1

클락이 언제 레넌 코트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 그는 여름이나 가을쯤 이곳에 왔을 것이다. 들어올 때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에게 입을 만한 옷이 얼마나 있었겠냐만은.

나는 그 애가 레넌 코트에 도착한 첫날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여전히 작은 위안을 준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내가 그의 첫 등장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라는 것만큼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진실.

눈을 감으면, 기억은 나무 덩굴처럼 발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가지를 드리운다. 적절한 가지치기 시기를 놓친 지 오래인 그 무성한 덩굴은, 내 혓바닥을 무겁게 짓누르며 끝없이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나는 몸속 깊숙이 발을 뻗은 기억의 잔뿌리를 느낄 수 있다. 과거는 나를 장악한 지 오래다. 기억은 언제나 나를 손쉽게 과거로 되돌려 놓고, 심지어는 현재에 머물고자 안간힘을 쓰는 나의 노력을 양분 삼아 끝없이 자라나기까지 한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혓바닥은 지나치게 무겁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내 망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는지…. 그러니 모든 것은 진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그저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한 불쌍한 꼬마의 망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날 나는 독방에 있었다. 자선 행사에서 말썽을 부렸다는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그네스 원장은 나로 인해 ‘훼손’된 치마의 주인이 레넌 코트에서 두 번째로 기부금을 많이 낸 후작 부인이라고 윽박질렀다. ‘훼손’이니 ‘배상’이니 ‘책임’이니 알게 뭐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관짝 만 한 독방에 꼬박 사흘을 갇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상대를 궁지로 몰고 싶을 때만 어려운 단어를 쓰는 어른들의 특성을, 나는 오래 전부터 경멸해 오고 있던 것이다.

사흘간의 감금 생활을 막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독방과 원장실로 이어지는 좁고 경사진 복도를 따라 나오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아그네스 원장이 또 가엾은 아이 하나를 붙잡고 훈계를 늘어놓는 줄로만 알았다. 문을 열고 나왔더니 못 보던 남자애 둘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내 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얼마 안 가 원장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현명하군. 이것이 두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내게 관심을 보이거나 인사를 건넸다면 두 사람 다 첫날부터 단단히 찍혔을 것이다. 아그네스 원장은 자기 권위를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여자니까 말이다.

아그네스 원장은 나 같은 문제아 따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두 녀석들의 태도에 내심 흡족했던 것 같다. 보통 같으면 붙잡고 또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을 게 뻔했는데도 내가 슬그머니 원장실 문을 열고 빠져나가려는 것을 못 본 척해주었으니. 하지만 내 눈에 두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순종적인 편이라기보다 눈치 빠르게 처신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나는 원장실을 빠져나온 뒤에도 한동안 주변을 맴돌며 시간을 죽였다. 레넌 코트는 교회에서 설립한 보육원으로,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거대한 본관 한 채와 학교로 쓰이는 작은 예배당 두 채가 서로 마주 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본관 1층 복도 끝에는 원장실이 있었는데, 이곳에 처음 온 아이들은 무조건 원장실에서 면담 시간을 가진 다음 기숙사로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반드시 중앙 로비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선 로비가 훤히 보이는 2층 계단에 붙어 서서 신입들을 내려다보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굳어져 있었다.

나는 늘 하던 것처럼 그곳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불과 며칠 전 런던 근교의 고아원 하나가 화재로 전소했다는 소식이 레넌 코트를 휩쓴 뒤였고, 나는 과연 거기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 그 고아원에서 왔을 것이었다.

원장실에서 봤던 두 녀석이 ‘죄수복’을 든 채 로비로 걸어 들어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귀쟁이 소굴Lennon Fart에 온 걸 환영해.”

그러자 두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네 어디서 왔냐?”

내가 물었다.

“스프링필드.”

까만 머리 쪽이 순순히 대답했고,

“여긴 소문이 참 느린가 봐.”

빨간 머리 쪽은 빈정거렸다.

두말 할 것 없이 나는 화가 났다. 두 사람이 정말로 소문의 그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 출신이라면, 딱한 사정을 고려해서 앞으로 그들이 겪게 될 힘겨운 기숙 생활 중 약간의 호의를 베풀어 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므로, 눈앞의 빨간 머리에게는 다소 괘씸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보란 듯이 난간에서 뛰어내린 다음 일부러 손을 털며 성큼성큼 빨간 머리 녀석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막상 서 보니 빨간 머리 녀석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키가 컸던 것이다. 옆에 선 까만 머리보다 컸고, 심지어는 나보다도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처음 온 녀석들은 아닌 척해도 이곳의 건물 규모나 엄숙한 분위기 따위에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헷갈렸다. 조금 겁만 줄 생각이었던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그제야 빨간 머리가 내 예상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훨씬 싸움을 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야.”

내가 방어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빨간 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나로서는 도무지 용서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녀석은 대놓고 나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래, 너희 둘 다 그 불탄 고아원에서 왔단 말이지?”

뒤늦게 아까의 빈정거림을 흉내 냈지만 빨간 머리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투를 바꾸어 사근사근 굴었다.

“그래. 불쌍하지?”

내가 생각지 못한 태세 전환에 당황한 사이, 빨간 머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밀어붙이듯 말했다.

“불쌍한 나에게 잘해줘. 응?”

그러면서 내 팔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이런 식으로 구는 남자애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빨간 머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비로소 그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큼지막한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수더분한 단발에 지저분하게 가르마를 탔고, 콧잔등에는 드문드문 주근깨가 있었다. 무엇보다 눈이 길고 컸다. 그 눈이 가늘어지더니 마찬가지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중심부에서부터 서로 다른 색깔이 뒤섞인 오묘한 회청색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그 빛에는 악의가 있었다.

“뭐?”

내가 멍청하게 대답하며 붙잡힌 팔을 내려다 보는 순간, 빨간 머리는 내 팔을 확 놓아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 나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에 무시를 당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이어진 빨간 머리의 말에서 그 감을 확신했다.

“넌 별로 똑똑하지는 않구나.”

어느새 빨간 머리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얼마나 잘났다고? 상급생들한테 그따위로 굴면 저수지로 끌려갈 걸.”

뒤늦게 겁을 줘봤지만 이미 알 수 없는 기세에 눌린 내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형편 없었다.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나는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오는 길에 봤지? 여기 뒤 저수지 말이야. 상급생들은 안 봐줘. 분명 널 끌고 가서 빠뜨려 버릴 걸. 네 건방진 뒤통수를 누르고 네가 허우적대다 죽어갈 때까지 쳐다볼 거야.”

빨간 머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는 거기 가봤어?”

“아니.”

“그러면 넌 겁쟁이구나.”

“뭐라고?”

빨간 머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난 안 무서워. 그까짓 것.”

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며 혼자 아치형 복도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 가? 거긴 여자 기숙사야!”

소리를 질렀지만 빨간 머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아니라니까!”

까만 머리 녀석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케니스는 여자애야.”

그는 나에게 다소 충고하듯 말했고, 상황이 조금 웃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넌 쟤가 저렇게 구는데도 헷갈리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그런 다음 얼버무린 걸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손을 내밀었다.

“조사이아 랭스턴이야.”

“클락 캄벨.”

클락이 내 손을 맞잡고 한 번 흔들었다.

“아까 이상한 데서 나오던데 거긴 뭐야?”

“독방이야. 원장이 히스테릭해질 때마다 열리는 지옥의 문이지.”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뭘 했길래 거기 있다 나왔냐?”

나는 악수한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짝다리를 짚었다.

“교회 의자에 풀칠을 했거든.”

“아, 그래.”

클락은 어느새 킬킬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몇 살이야?”

“몇 살 같아 보이는데?”

나는 클락을 쳐다보았다. 그는 동양인 혼혈아였고, 그래서인지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동양인들은 나이보다 앳되게 보인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만만해 보이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나는 더욱 클락의 나이를 오해했다.

“음, 열다섯 살?”

내가 불확실한 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후하게 쳐주냐? 열세 살인데.”

“뭐야, 나보다 한 살 어리네.”

나도 모르게 반갑게 대답했다. 잠시 후 머뭇머뭇 물었다.

“아까 걔는?”

“케니스? 걔도 열세 살이야.”

‘뭐야. 둘 다 애송이였잖아?’

그렇다면 별로 겁먹을 것도 없었다. 클락은 내 표정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뜻으로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더는 그를 무서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클락과 함께 기숙사로 향하는 동안 나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상급생들이 침대 뒤지러 오거나 뭐 달라고 하면 그냥 줘버려. 아까 저수지 얘기는 진짜거든.”

“상급생들이 몇 살인데?”

“열다섯 살이랑 열여섯 살 애들이야. 어, 그거보다 나이 많은 애들도 있긴 해. 나이 속이고 죽치고 있는 애들도 있거든. 아무튼 처음에 좀 얌전히 굴면 그 뒤로는 신경 끄니까 당분간만 조심해.”

“처음에 설설 기면 그 뒤로는 안 건드린다고? 그것도 신기한데.”

“애들이 많아서 어지간하면 눈에 잘 안 띄거든.”

우리는 남자 기숙사 현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수업 시간이었기 때문에 기숙사는 텅 비어 있었다. 그가 바로 옆방을 쓰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꽤 기뻤다. 층이 갈렸으면 앞으로 그와 마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클락이 배정받은 곳은 열 넷이서 쓰던 방으로, 창이 나 있어서 보기에는 좋았지만 창가 쪽 침대 자리가 엄청나게 추웠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클락이 물었다.

“그 상급생들은 몇 살부터 저수지에 데려가냐?”

“그런 거 없는데.”

“어린 애들은 안 데려가?”

“얼마나 어린 애들?”

“열 살 정도 되는 애들.”

“남자애면 데려갈 때도 있어.”

“여자애는?”

“모르겠는데. 아마 안 데려갈 걸. 애초에 여자애들하고 마주칠 일도 별로 없어.”

나는 여자애들은 우리랑 다른 건물을 쓰는 데다 수업도 따로 듣고, 일과도 우리랑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아그네스 원장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같은 생활공간을 쓰는 것을 정숙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여자애들하고 마주칠 수 있는 건 식사 시간, 그리고 수업 시간이 붙어 있는 교실을 빠져나갈 때뿐이었다.

“여기 애들은 다 잔꾀가 많겠네.”

클락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건물 좀 따로 쓴다고 걔네가 안 만나겠냐?”

갑자기 클락은 뒤늦게 내가 귀찮아진 듯했다.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런데 넌 수업 안 듣냐?”

그러고는 아직 자기 말뜻을 곱씹고 있는 내 면전에 대고 손을 휘휘 저어 보이더니 뒤돌아 문을 닫았다.

 

 

2

나이를 먹을수록 심술궂은 예언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이것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숙명 같은 것인데, 런던 전역에 깔린 고아원 아이들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자기 앞으로 낙점된 제각각의 불행한 예언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케니스 리드의 경우에는, 아래와 같았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입양은 물 건너갔구나. 여기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너 같은 건 공장에서도 써주지 않을 거다.”

아그네스 원장은 핏불테리어처럼 두 뺨이 늘어진 늙은 여자였다. 그녀는 세모꼴로 생긴 희한한 안경을 콧대에 걸치고 있었는데, 서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대놓고 케니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종국에는 소리 내 혀까지 찼다. 함께 도착한 클락 캄벨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클락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다가, 막바지에 성의 없이 서류를 뒤적이며 “정말로 열세 살이 맞는 거냐.” 정도만 물어봤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자동차라는 것을 탔다.

스프링필드가 전소하고 이틀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는 다 타버린 잔해를 구경하다 말고 지나칠 정도로 비탄에 잠겨서는, “크리스마스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무척이나 안타깝다”고 했다. 그러고는 품목을 체크하는 것처럼 케니스와 클락을 골라낸 다음, 서류를 챙기면서 두 사람을 차례로 좌석에 태웠다. “무언가 가져가고 싶은 게 있다면 챙겨가렴.” 스프링필드의 교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두 사람은 내리지 않았고, 잠시 후 운전수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익숙한 풍경이 점점 멀어져 가는 동안 케니스는 방금 말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틀 동안 스프링필드의 아이들은 런던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케니스는 고아원이 불탔다는 사실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받아들인 몇 안 되는 아이 중 하나였는데, 그것으로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했다고 내심 믿고 있었다.

그 때 케니스는 옆 좌석에 앉아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클락 캄벨 또한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유년 시절을 위탁했던 장소를 한순간 잃은 데다 어딘지로 모를 곳으로 물건처럼 실려 가고 있는 때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댈 구석이라고는 클락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케니스는 자신이 느끼는 동질감이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강력히 생각하고 있었다. 고작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클락에게 동질감을 느끼다니. 그것은 약한 아이들이나 저지르는 실수가 아닌가.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떼를 쓰는 아이들─속이 빤히 보이는, 그래서 쉽게 상처 받는 아이들이나 타고난 자질이 아니었던가.

케니스는 자신이 여태껏 보아 온 아이들처럼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쉽게 훼손당하지 않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자신의 내면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요컨대 케니스 리드가 옆자리에 앉은 동갑내기 남자애한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스프링필드 화재 사건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강인한 동류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아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클락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것도 그 동질감 때문이었다. 약한 소리를 하게 될까 봐 스스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스프링필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말까 봐, 지금 가는 곳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털어놓고 말까 봐, 진실로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클락 캄벨의 존재에 위안 받는 자신의 나약함을 들키고 말까 봐 곤두서 있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자동차에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거대한 저수지를 지날 무렵 그것을 보려고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거대한 철제 정문을 통과해 현관 앞에 내려 음산한 복도를 마주할 때까지 케니스는 클락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원장실에서 면담을 마치고 나왔을 땐 신세가 상당히 비참해져 있었으므로, 결국에는 혼잣말인 것처럼 연기하면서 클락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원장이 저렇게 얼간이일 줄은 몰랐어.”

케니스가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다 그렇지. 뭘 기대한 거야?”

클락이 심드렁하게 대꾸했고, 케니스는 그를 쏘아보았다.

“누가 기대했대?”

“좋은 말 해줄까 봐 기대한 거 맞잖아? 서류 뒤적일 때마다 눈 굴린 게 누군데 그래.”

“그런 적 없어.”

케니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아무 말도 안 들었잖아.”

“그래서 부럽냐?”

“기분 나쁜 말은 안 들었잖아.”

“아, 그러셔. 없는 취급이 더 낫다는 거지.”

훗날 케니스는 이 짧은 대화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 순간에는 나도 클락도 엉망진창이었다.” 면담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하게 모욕적이었고, 케니스와 클락은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느라,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아그네스 원장이 두 아이들에게 취한 태도는 그들에게 배정된 미래를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로비에서 나를 마주치기 전부터 한 차례 말다툼을 벌인 뒤였다. 그래서 내가 끼어든 뒤에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거였다.

돌이켜 보면 두 사람은 매번 그런 식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 그 둘은 항상 다투고 있었다. 용건 때문에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 양 담백하게 행세하다가도 갑자기 어딘가 마음이 상한 것처럼 흩어지기 일쑤였다. 특히 내 눈에 케니스는 클락을 지나치게 함부로 대하는 면이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클락에게 기분 나쁠 만큼 거만하게 굴었다.

클락이 왜 그렇게까지 케니스를 봐줬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낼 수 있던 건 전적으로 클락이 신사적이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클락에게 케니스와 친구 사이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아 보였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면 원래 그렇지 않은 사이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아는 체를 하거나 한동안 붙어 다니곤 하던데, 두 사람은 별로 그렇게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튿날 점심시간이었다. 날씨가 흐렸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클락과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막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보내진 참이었는데, 웬 여자애 하나가 식당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모습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클락과 ‘죄수복’을 두고 불평을 주고받는 중이었던 나는, 중간부터 그 여자애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본다고 대화를 거의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길어서 불편한데.”

클락이 소매를 접으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대답을 어물거렸다. 그때 건성으로 걷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이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자리에 멈추어 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 쪽을 살피더니 집게 손으로 치마를 들추면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불결한 것이라도 잡는 듯 손목에 힘을 풀고 좌우로 흔들 때마다 무릎 위로 말려 올라간 치맛단이 우스꽝스럽게 흐느적거렸다. 그제야 나는 여자아이가 케니스 리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케니스가 나를 향해 장난을 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어느새 클락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대단한 구경거리를 봤다는 듯 미소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도 상황을 똑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클락이 낄낄대기 시작하자 케니스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감쪽같이 자세를 바로잡고는, 치마를 툭툭 털었다. 과장되고 매끄러운 몸짓이 꼭 한 편의 연극 같았다.

케니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 차례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볼일을 마친 케니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 클락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그새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소매를 접다 말고 배식 받는 음식을 기웃거리면서 산만하게 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거리감에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물었다.

“둘이 친해?”

“어, 아니.”

클락은 무심하게 대답한 다음, “그런 말 하면 화낼 걸.”하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는데, 기분 나쁘다는 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뭐. 그래, 친한 건 아니지.”

나는 케니스가 신경이 쓰여 물었다.

“쟤는 어디로 가는 걸까?”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다음 클락은 정말로 관심 없는 듯 그 주제에 관해서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식사하는 내내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그 뒤로도 종종 그러했다.

지금은 그가 진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그 무렵 클락은 누구에게도 크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내게 가장 많은 관심을 보여준 시기도 이때였는지 모른다. 아직 선입견이 만들어지지 않은, 클락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을 그 무렵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진짜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클락에게 나와 잘 어울려 다니는 녀석들을 소개해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건물 뒤편에 대여섯 명이 모여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지금으로써는 싸움꾼이었던 뱅크스 말고는 누가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금방 클락을 마음에 들어 했다. 클락은 우리가 노는 방식을 재미있어 했고 과감한 말썽을 계획할 때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로부터 그렇게 빠르게 인정 받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나는 클락을 한눈에 마음에 들어 한 스스로의 안목에 은밀한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클락을 상급생 몇 명과도 연결해주고 싶었다. 얼른 내가 유용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중 몇 명은 두려울 것이 없는 불량한 상급생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그럭저럭 편의를 누리고 있었는데, 어리석게도 당시에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며칠 뒤 상급생들이 우리를 불렀고, 나는 클락을 끼고 그곳으로 갔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나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전망했던 것 같다.

상급생들이 클락을 못마땅해 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클락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몸집이 작았고, 동양인 혼혈아인데다 인상도 반항적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꽤 튀는 존재였고 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심지어는 클락조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략적으로는 예감했던 것도 같다.

나는 부주의했다. 상급생 인맥을 소개해줌으로써 보잘것없는 권력을 과시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던 나는, 단순히 클락이 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 또한 비슷한 호감을 가지리라 자연스럽게 결론짓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고는 그 판단을 점검할 새도 없이 일을 추진했다. 그 무렵 클락이 배척 받으리란 가능성은 내 머리를 잠시 스쳐 가는 막연한 상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째서 상급생들이 클락을 그토록 거슬려 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 클락이 내게도 잠시 보여주었던 기술, 요컨대 표정을 감추고 어떠한 질문에도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만큼 우리와 어울리기에 더없이 적합한 소질이 따로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도 그가 어떤 아이인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더 프레보스트는 우리의 캡틴이었다. 열일곱 살이었지만 보육원 어른들은 그를 열여섯 살로 알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를 과할 정도로 무서워했다. 그가 다혈질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아더는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는 나이를 속였음에도 서류상으로도 나이가 다 차버리는 바람에 내년에는 보육원을 나가야 하는 신세였는데, 우리 중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에는 그가 어떤 수를 써서든 이곳에 남는 방법을 찾아내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더가 클락을 싫어한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클락이 혼혈아여서일 수도 있고, 너무 튀어 보인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클락을 데려간 그날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취한 태도를 번복하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클락에 관한 앞으로의 취급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일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질 나쁜 장난이 시작되었고, 점점 심해졌다.

상급생들이 신발을 지붕 위로 던져두거나, 교사에게 질 나쁜 장난을 걸어놓고 덤터기를 씌우는 정도는 모두가 한 번쯤 경험해 봄 직한 일이다. 그 정도는 ‘입단 절차’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느닷없이 건물 뒤로 끌고 가선 웅덩이에 던져놓고 낄낄대거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정도라면?

그건 아주 예외적인 수준의 괴롭힘이었다. 그런 일을 당해놓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아이는 없었다.

당혹스러운 며칠이 흐른 후, 나는 이 일이 내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단숨에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리 빠른 녀석들은 벌써 태도를 달리하고 있었고, 재빨리 괴롭힘에 가담하는 영악한 녀석들까지 생겨났다.

남자 아이들은 점점 클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나조차 그의 능력을 의심했던 것 같다. 상급생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두려웠다가, 화가 났다가, 마침내는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은연중에 클락이 첫인상에 비해 별거 없는 녀석이며, 그렇다면 처음부터 우리와 어울리기에는 지나치게 소심한 아이가 아니었겠냐는─결과적으로 이 사태는 언젠가 벌어질 일이 아니었겠냐는 생각을 품었던 것도 같다.

자신의 책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도 어렵다. 사람들은 원래 산산조각 나기 싫어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이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고, 상황이 따라주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며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네가 처신을 변변찮게 한 탓도 있노라 항변하면서 책임을 이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무의식에 빠져드는 건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비겁했지만 그랬다. 나는 그런 합리화를 통해서만 간신히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부류였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클락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모든 순간을 돌이켜 봐도 말이다.

나는 클락의 그런 완고함이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에게 더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주변 아이들은 점점 방관에 익숙해져 갔지만 나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고 할지라도, 그 무렵 내가 클락에게 은밀히 집착한 건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케니스가 남자 기숙사에 드나든다는 거 진짜야?”

수업이 끝난 어느 오후, 리스가 대뜸 그렇게 물었다. 오후 햇살이 아치형 지붕 위로 떨어지고, 우리는 그림자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거의 소곤거리고 있었다.

“너희네 케니스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

내가 벽에 바짝 붙어 서서 말했다.

“여자애가 어떻게 남자 기숙사에 들어와? 여자애면 치마 때문에 멀리서도 다 보여.”

“걔가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본 애가 있대.”

리스가 강한 어조로 진지하게 말했다.

“얘기가 진짠지 아닌지만 말해줘.”

나는 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이런 행동이 무척 낯설었다. 리스는 나와 같은 고아원 출신인 여자애로, 몇 년 전 나와 함께 레넌 코트에 입소한 후로 곧잘 붙어 다녔지만 나이를 좀 먹은 뒤부터는 통 교류가 없어서 최근 일 년 동안은 거의 모르는 사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리스가 갑작스럽게 접근해서 대뜸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내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게 진짜면 걔가 순순히 얘기하겠어?” 리스는 좀처럼 머리를 쓰지 못하는 나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왜 내가 굳이 널 찾아왔겠니?”

리스는 케니스가 티가 나지 않는 문제아라고 했다. 걸핏하면 수업을 땡땡이치거나 잠만 자고, 과제도 거의 해 가지 않아서 빈번히 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식사 시간에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점호 직전에 돌아온 날까지 있었다. 그런데 몇몇 여자애들을 제외하곤 이 일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내 기준에 그 정도는 레넌 코트에서 문제 축에도 들지 않았다. 듣기로는 교사들도 그녀를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밖을 쏘다니는 건 좀 문제겠지만, 나로서는 들키지 않았으니 상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정 그러면 걔랑 친한 애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여자애들끼리는 비밀 얘기 같은 거 하고 그러지 않아?”

그러자 리스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친한 애가 없어.”

그때 가까운 곳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발소리는 점점 다가오면서 우리를 긴장시키다가 서쪽 복도를 따라서 점차 멀어져 갔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리스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마지못해 말했다.

“걔가 남자 기숙사에 들락거리는 건 본 적 없어. 그럴 이유도 모르겠고.”

“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리스가 실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게 흥미가 떨어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말 걸었는데 받아줘서 고마워.”

선심을 쓰는 투로 리스가 말했다.

“그래도 다 같이 있는 데서 아는 척은 안 했으면 좋겠어.”

“왜?”

“조 넌 불량아잖아.”

그렇게 힐난한 다음, 리스는 나를 두고 복도를 떠났다.

며칠 뒤 여자 기숙사 옆을 지나가던 중에 나는 케니스가 두 손을 든 채 벌을 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아마도 ‘다시는 수업을 빼먹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을 팻말을 목에 걸고 있었고, 표정이 뾰로통했다. 기숙사 사감인 미스 메이필드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케니스는 팔을 내리고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케니스의 머리 위로 남학생들이 그린 음란한 낙서가 난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로서도 구체적인 건 읽을 줄 몰랐지만, 개중 상당 부분이 클락 캄벨에 관한 조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벽의 낙서를 올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케니스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일부러 그녀에게 강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너 남자 기숙사 드나드냐?”

케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럼 지금은 왜 그러고 있는데?”

일부러 팻말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케니스는 자기 목에 걸린 팻말을 내려다 보고는, 나를 쳐다봤다.

“수업 빠진 거 누가 일러바쳐서.”

나는 아마도 리스의 짓이리라 생각했다.

“저 벽 낙서 네 친구들 짓이야?”

케니스가 고개를 기울이고 위쪽을 가리켰다.

“아니.”

그러자 케니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 뒤편에서 반짝 하고 빛이 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는 못 견디게 그녀가 불편해졌다.

“너 이제 씨씨랑 안 다니는구나.”

케니스가 불쑥 말했다.

“씨씨?”

“그래, 씨씨.”

클락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치부를 들킨 것처럼, 나는 발끈했다.

“네가 알 바야?”

그런 다음 속수무책으로 되물었다.

“그, 런데 왜 씨씨라고 부르는데?”

케니스는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은 나를 무척이나 측은하게 여기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넌 그것도 모르고 그 애랑 같이 다녔니?”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케니스가 시치미를 떼면서 슬그머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언젠가 클락이 방문 앞에서 나를 내쫓기 위해 손을 내젓던 것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미스 메이필드가 등장했고, 나는 알 수 없는 혼란에 잠겨 그 자리를 떠났다.

지금은 나 역시 클락 캄벨을 씨씨라고 부른다. 클락을 아는 대다수가 그러는 것처럼. 이제는 예전 일을 추억할 때 기억 속의 어린 내가 그를 클락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씨씨라 부르는 쪽을 떠올리는 편이 익숙할 지경이다.

그의 성과 첫 번째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그 애칭은, 케니스로부터 전해 듣고 무의식중에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쉽게 불려오고 있었는데, 의외로 나는 클락으로부터 직접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태 몰랐냐?”

그는 오히려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때까지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를 씨씨라고 부르지 않았으므로 알 길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항변하지 못했다. 민망함을 감추려 애쓰면서 물었다.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도 돼?”

“그거야 네 맘이지.”

그렇게 얘기하는 클락은 놀랄 만큼 나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어 보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클락과 다시 가까워졌다. 그가 입소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클락이 괴롭힘에서 벗어난 게 언젠지 가물가물한데, 아마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뚜렷한 사건으로 촉발된 변화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보다는 장막처럼 서서히 드리운 인식의 변화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 클락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인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속으로는 어땠을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클락은 호된 괴롭힘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 남자들에게 몹시 중요한 능력이었다. 나를 포함한 남자아이들에게 있어 남자란 것은 자존심이 꺾이는 모습이 눈에 보일수록 그 형편없음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존재라 여겨졌는데, 그 분야에서 클락은 잃은 점수가 거의 없었다.

돌이켜 보면 클락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이 일반적인 아이들 같지 않아서 모두 감쪽같이 속은 것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허풍스럽게 수선을 떨거나 허세를 부리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속마음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클락은 자기 나이에 비해 냉정하고 계산적인 데다 머리가 재빠른 축에 속했는데, 심지어는 나 같은 아이들이 깜빡 속을 정도로 능청맞게 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레넌 코트의 남자아이들은 저마다 상급생들로부터 ‘입단 절차’를 치른 바 있었고, 소위 나이 많은 형들에게 한 번 굴복당한 뒤로는 고분고분 굴었기 때문에 클락의 이런 지점은 알게 모르게 내면을 자극하는 바가 있었다. 클락이 상급생들에게 처참히 굴복당하리라 여기며 불편한 마음으로 눈 돌렸던 우리의 내면은 언젠가부터 그를 다시 강한 남자로 인정하고 싶어 했다.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상급생들은 점점 클락에게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들 자신이 그러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클락을 놀리는 것이 뭐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그놈의 아더 때문에 매번 괜한 체면을 차리게 되었다는 소극적인 불평이 슬슬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괴롭힘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관성으로 자리잡히기 때문인데, 클락이 그들 생각보다 굴욕을 겪지 않았으므로 그를 괴롭히는 건 매번 의식적으로 시도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기 시작하면 결국 불평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한 여론이 겉으로 심각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퇴소일이 가까워질수록 상급생들 대다수가 클락을 내버려 두었고, 그로 하여금 우리 또한 잠재적으로 그를 우리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아더 프레보스트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갈수록 클락에게 악랄하게 굴었다. 나중에는 괴롭힘의 수준이 너무 치졸할 지경이라, 내가 봐도 아더가 초조해져 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클락을 괴롭히기 시작한 아더는 클락이 보기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남자아이란 것을 알아차렸다는 이유만으로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는 클락을 제대로 손봐두지 않으면 자신이 우스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라도, 실제 일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보낸 마지막 여름에, 아더 프레보스트는 결국 클락을 저수지로 불러낸다.

그때까지 클락의 위신이 꺾여야 자신의 체면이 선다고 믿던 상급생 몇 명도 그 자리에 함께 참석했다. 나와 다른 녀석들은 겁에 질려 저수지로 향했다. 나머지 상급생들은 호기심 때문에, 또는 지겨운 척을 하면서 저수지로 향했다. 근래 들어 아더가 하는 짓이 너무나 빤했으므로 우리는 아더가 또 다시 클락을 겁주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하다 결국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쯤에 저수지라는 것은 아더가 내놓은 최후의 방책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더는 클락을 단순히 협박할 목적으로 그곳에 불러낸 것이었다. 얕은 구역에 클락을 세워두고 기분 나쁘게 밀치면서 언제든 깊은 곳으로 빠뜨려 버릴 것처럼 굴었지만 그 이상으로 일을 끌고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른 상급생들이 여태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일은 그보다 더 형편 없게 흘러갔다.

내내 욕설을 구시렁거리며 윽박지르는 아더의 모습은 갈수록 클락의 모습과 대조되었다. 반면 클락은 평소보다 조금 긴장하긴 했어도 멀쩡해 보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까지 평정을 잃지 않은 듯했고 심지어는 중간중간 빈정거리는 투로 아더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결국 아더는 분노로 돌아버리고 말았다.

그때 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는데 아더가 점점 힘을 잃어간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클락은 이 상황에 전혀 겁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가엾은 아더 프레보스트가 자신을 빠뜨려 죽일 깡이 없다는 것을 클락은 훤히 꿰뚫어 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어떤 행동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락은 무슨 수를 써도 겁먹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런 그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숨죽이기 시작했고, 아더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다리를 떨면서 점점 부산스럽게 굴다가 마침내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초조함에 못 이겨 클락의 덜미를 확 낚아챈 그는,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우리의 시선을 의식하곤 성큼성큼 저수지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클락의 뒤통수를 붙잡고 그대로 물속에 처박았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아더는 미친 사람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수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클락이 몸부림을 치며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을 아더가 몇 번이고 제지하자, 마침내 우리는 모두 겁에 질렸다.

상급생 몇 명이 벌떡 일어났다. 아더가 고함을 질렀다.

“가만히 있어!”

핏발 선 눈으로 그렇게 외쳤는데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클락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기름처럼 물이 사방팔방 튀어 오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더! 그쯤하고 돌아와!”

상급생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쯤 하면 됐어!”

“오늘 이 자식을 끝장낼 거야!”

“곧 졸업이야. 문제 일으키지 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아더가 핏발 선 눈으로 악을 질렀다.

“그딴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때였다. 용수철처럼 솟구쳐 오른발 뒤꿈치가 아더의 아래턱을 정확히 가격했다. 깜짝 놀란 아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턱을 감싸 쥐느라 자세가 무너진 순간 물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아더를 잡아끌었다. 기침을 하면서 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락이 덤벼든 적은 종종 있었지만 압도적인 체격 차 때문에 아더가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날은 달랐다. 무언가 운이 따라주었다. 상급생들은 물 밖에 있었고, 아더는 심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물에 빠진 아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우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상실한 그는 그 순간 클락보다 훨씬 작고 허약한 사내아이나 다름없었다.

클락은 죽기 살기로 아더에게 덤벼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더가 괴상한 고함을 지르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지만 클락은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물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면서 두 사람은 물뱀처럼 뒤엉켰다. 클락은 꼭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매섭게 아더를 몰아붙였다. 진짜 그를 죽일 수라도 있을 것처럼 말이다. 반면 아더는 정말로 겁에 질렸다. 그는 클락을 제압해왔던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결국 미스 메이필드가 이 모든 소동을 전달 받고 저수지로 달려왔을 즈음, 아더는 코피를 흘리면서 잔뜩 겁먹은 얼굴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저수지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 두들겨 맞고 독방으로 끌려간 아더는 퇴소일에도 결국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클락은 몸을 엄청나게 떨다가 곧장 병동으로 실려 갔는데, 그를 직접 물 밖으로 데리고 나온 상급생 말로는 “아마 다쳐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클락이 여느 아이들처럼 두려워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런 일을 당한다면 누구라도 몸을 떨 만큼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를 겁쟁이라 생각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클락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상급생조차 클락이 충격을 받아서 그렇게 떨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클락 자신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클락은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천성을 타고난 듯하다. 그 능력은 일견 평범한 남자아이에 지나지 않는 그를 결정적인 순간 비범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얼마 뒤 클락은 멀쩡한 얼굴로 복귀했다. 주먹다짐이 무승부로 끝났다 하더라도 우리들 눈에 이 싸움의 승자는 클락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슬그머니 태도를 바꾸었다. 클락을 괴롭혔던 녀석들에게는 차례차례 보복이 행해졌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특히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녀석들을 클락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봐주었다. 결국에는 자기 차례가 올지 모른다고 불안해 하면서도 우리는 그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올바른 일인 양 앞다투어 지지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클락에게 진 부채감을 깨끗이 청산해 나갔다.

사내 아이들의 화해란 늘 이런 식이다. 결국 모두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잊어버렸을 즈음에는 저마다 클락을 동료나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그러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클락 캄벨에 대한 인상은 전부 이 이후에 만들어진 모습들인 셈이다.

그랬다. 그때서야 보육원의 대다수가 그를 씨씨라고 불렀다.

 

 

3

그 무렵에는 몇 가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우선 첫번째로 클락이 보육원에서 자기 위치를 되찾은 사건이 있었다.

모두를 겁에 질리게 했던 아더 프레보스트가 쫓겨나고, 교사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한 명은 남자였는데 곧바로 남자 기숙사 사감이 되었다. 그는 주로 고학년들의 체벌을 담당했다. 과묵한 편이었고, 평소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조그만 말썽 정도는 눈감아주었다.

나머지 한 명은 여자 교사였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귀족 여자들만 다니는 학교를 나왔으며 지금은 남편과 함께 봉사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젠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여학생들에게 자수를 가르쳤다.

그리고 케니스 리드가 클락 캄벨을 꾀어내 일을 꾸미기 시작한 사건이 있다.

어떤 사건이 앞이고 어떤 사건이 뒤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이 세 가지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제각각 벌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 사건은 그보다 조금 더 앞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쯤에서 케니스 리드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다소 못마땅하다. 클락만 아니었더라면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내 나름대로 기억하는 모습은 있었겠지만, 그것은 지극히 파편적인 일면에 불과했으리라.

몇 가지 사건만 아니었다면 오늘날 리스나 다른 여자아이들이 내게 남긴 인상 정도만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케니스를 떠올리고 있자면 괴로운 마음까지 든다.

어쩌면 나는 오래 전부터 케니스에 대해서만큼은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남학생 모두가 그녀를 두고 한 마디씩 얹을 때조차 말이다…. 나는 케니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보육원에서 케니스 리드에 대해 가장 잘 알게 된 남자애는 나였다. 아직도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클락이 자신의 위치를 되찾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그를 따라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날씨 좋은 이른 오후였다. 클락은 진작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 역시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를 따라서 무작정 교실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 수업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 무렵 나는 클락의 눈치를 보느라 애를 먹고 있었고, 오로지 그에게 잘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곳에 앉아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엔 다들 그랬으리라 믿는다. 나뿐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조금씩은 클락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특히 클락의 지난 반 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던 나는,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클락으로부터 확실한 용서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랬다. 나는 지난 일을 만회하고 싶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에게 원한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클락이 무언가 계획하게 된다면 당연한 듯 거기에 포함되고 싶었다. 그가 날 그의 친구로 여긴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클락과 어떻게든 붙어 다니려고 했던 거였다.

원래부터 클락은 수업을 잘 듣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단어 수업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낸다는 건 나로서는 다소 아리송한 행동으로 여겨졌지만 군말없이 수업 시간에 맞추어 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클락은 진작부터 창가 구석에 자리를 잡은지 오래였고, 내게 남은 선택지란 그와 대각선으로 두 칸이나 멀리 떨어진 뒤쪽 가운데 자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얼마 가지 않아 클락은 물론이고 교실 뒤편에 앉은 남학생 대부분이 졸기 시작했으므로 결국 나 역시 중간부터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겨우 잠에서 깨어났을 땐 수업이 끝나 있었다. 주변이 어수선했다. 나는 황급히 클락이 앉은 창가 쪽을 확인했다.

클락은 웬일로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가 산만하게 출구로 나가려는 때 클락은 태연한 표정으로 자기도 막 일어나려는 척을 하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클락이 책상 아래를 재빨리 스윽 훑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클락은 작은 쪽지를 쥐고 있었다.

나는 클락이 미끄러지듯 출구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클락은 벌써 아이들 틈에 섞여있다 말고 슬그머니 샛길로 방향을 튼지 오래였다. 허겁지겁 그의 뒤를 밟았다. 클락은 점점 기숙사와 멀리 떨어진 길로 걸었고 그럴수록 주변은 조용해져 갔다.

클락이 향한 곳은 교사들이 못쓰게 된 가구나 비품을 쌓아두는 용도로 사용하는 창고였다.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데다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물론이고 교사들도 평소에는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일까? 쭈뼛거리며 뒤를 밟던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건물 앞에서 누군가가 클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화가 난 것 같았다. 클락이 손을 흔들자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나는 상대가 케니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케니스는 클락을 그렇게 다루는 게 익숙해 보였고 클락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비밀스러운 접선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이 얼마 안 가 창고 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이 금방 밖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초조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이 나올 기미가 없자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문앞으로 다가섰다. 숨죽여 귀를 기울이자 인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그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건물을 빙 둘러 창가 쪽에 다가섰지만 온갖 잡동사니로 시야가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슬슬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사감 선생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매를 맞게 될 것이다. 클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여자애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다니. 보육원 아이들이 알게 되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리스의 말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어쩌면 케니스 리드는 그동안 클락을 만나기 위해 정말로 남자 기숙사를 드나들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것이 아닐까…….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도망치듯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다.

그 뒤로도 클락은 종종 어디론가 사라졌다 돌아오고는 했다.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번 달라졌다. 때때로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가 분명 창고에 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케니스와 단둘이 어떤 일을 꾸미는 모습을 상상했다.

클락은 답지 않게 수업을 들으러 가기도 했다. 그런 때면 클락은 일찍부터 자리를 선점해 놓고 막상 수업 시간이 되면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수업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휙 하고 사라졌다. 나는 클락에게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무언가 꿍꿍이를 벌이고 있음을 깨달은 건 이 보육원에서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케니스는 갑자기 수업을 열심히 들으러 다녔다. 교사들이 케니스를 예뻐하기 시작한 게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특히 그녀는 글을 쓰거나 단어를 외우는 일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소설 읽는 시간이나 문법 수업에는 꼭 참석했고 가끔 예배를 듣기도 했다. 물론 예배당에서 남학생들이 수업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두 사람이 장소를 바꾸어 가며 쪽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리스에게 들은 것도 있었고, 훗날 여러 가지를 알게 된 내 나름의 판단도 섞여 있긴 하지만, 실제로 레넌 코트에 입소하고 몇 달 간은 케니스에게도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였던 것 같다.

그녀가 클락처럼 대놓고 괴롭힘을 당하거나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그녀 자신이 보육원 생활에 의욕이 없어서 벌어진 문제로 보였다. 처음 몇 번은 성실하게 수업을 들으러 다녔지만 어느 순간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여자 아이들과도 썩 순탄치 않았다. 케니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다녔고 혼자 행동했다.

여자 아이들은, 개중에는 리스처럼 케니스를 미워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대놓고 미워할’ 정치적인 명분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데면데면 굴었다. 케니스가 그러한 취급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라도 그런 식으로 그녀를 배제하는 일에 죄책감은 필요치 않았던 것 같다.

케니스가 교우 관계에 좀 더 공을 들이는 부류였다면 여자 아이들이 케니스를 보다 적극적으로 배척할 기회가 있었을성 싶다. 하지만 케니스는 교묘한 태도를 취하면서 모든 문제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고의라기보다 그녀가 가진 천성에 가까웠는데 때로는 케니스도 자기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레넌 코트의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사실에 큰 감흥이 없었다. 간신히 동화책이나 읽을 줄 아는 애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다고는 해도 간혹 뛰어난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나는 한번도 그런 부류의 아이들을 신경써본 적 없었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케니스는 그들의 존재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충격을 받을 줄 스스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레넌 코트의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케니스와 비슷한 수준으로 쓰고 읽을 줄 알았는데, 혹은 그것보다 훨씬 미흡하더라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끔 감추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대다수가 케니스보다 오래 배웠고, 레넌 코트의 생활에도 익숙했으며, 수업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은, 설령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남들 앞에서 결코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주말마다 들락거리는 귀족 대학생들은 지나치게 어려운 수준으로 수업했다(그들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는 자신을 위해서만 가르칠 줄 아는 인간들이었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케니스가 스스로의 수준을 다시금 판단한 것이 아닐까 싶다.

훗날 나는 케니스가 예전 고아원에 있을 적에도 종종 소설을 쓰던 여자애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는 오랫동안 “레넌 코트에서 소설을 쓰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케니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를 다 먹은 지금에야 그녀의 상실감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 효능감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하찮게 여기면서부터 케니스는 모든 일에 빠르게 의욕을 잃어갔다. 교우관계도, 배우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한순간 의미를 잃었다. 그녀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소설을 쓰고 단어나 문법을 배우려 들었던 것이다.

나는 케니스가 소설을 관둔 이유나, 다시 쓰기 시작한 이유가 똑같은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클락이 거기에 조금 개입했을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케니스 자신만이 관여할 수 있는 의식에 관한 문제였으리라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 역시 효능감에 관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면 그녀가 왜 하필 클락을 그 창고로 불러냈는지도 알 것 같다. 클락이라면 그녀가 레넌 코트에서 평범하다 못해 형편 없는 수준에 머무는 여자 아이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니. 마찬가지로 케니스 역시 클락의 처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해주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서로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면야 클락이 상처를 달고 오든 엉망진창인 차림새로 나타나든, 그녀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한동안 나는 무언가 일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구체적으로 뭘 기다렸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창고로 돌아가서 두 사람을 염탐하거나 케니스를 추궁하는 일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나는 언젠가는 클락이 “그러고 보니 케니스 말인데,”하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얼핏 가지고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끝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먼저 물어보지 않는 한 클락은 케니스에 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가까운 친구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어느 날 복도를 걷다 말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본 나는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때 클락은 본관과 예배당을 잇는 동쪽 복도 기둥에 기대어 서서 돌을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받는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불쑥 말을 걸자 돌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씨씨.” 하고 부른 다음, 다짜고짜 물었다.

“케니스를 좋아하는 거야?”

클락은 그보다 황당한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쩌다 얘기가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쪽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동안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소심하게 말을 더듬거렸다.

“저번에 단둘이 정원에서 대화하는 걸 봤는데….”

“아, 그래. 그것 때문이군.” 클락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난 번에 빌린 연필 돌려준 거야. 걔가 하도 닦달해서 말이야.”

“왜 여자애한테 물건을 빌리고 그래?”

내가 발끈하자, 클락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내 물건은 전부 도둑 맞았잖아. 한동안 너희한테 빌리기도 뭐 한 처지였고.”

그가 지난 일을 꼬집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이번엔 클락이 되물었다.

“너 걔한테 관심 있냐?”

“아니!”

나도 모르게 외친 다음, 아차 싶어져서 횡설수설 덧붙였다.

“내 말은, 의심스러워서 그런 거야. 내 친구 중에 리스라고 있는데, 걘 여자애거든. 걔가 말해준 건데 케니스가 남자 기숙사를 왔다갔다 한다더라. 너 알고 있었냐?”

클락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소문 자체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 듯했다.

“모르겠는데. 걔가 거기 드나들 이유가 있나?”

그 순간 그가 너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네가 케니스랑 단둘이 만나는 걸 알고 있다고, 몰래 쪽지를 주고 받는 것을 다 봤다고, 네가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게 그 일 때문이란 것도 전부 알고 있다고 얘기했더라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걔는 믿을 만해?”

클락은 질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믿을 만하냐고?”

“그래. 네가 보기에 말이야.”

너무 무겁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내가 말했다.

“걔가 괜찮은 애라고 생각하냔 말이야.”

클락이 아주 의외의 대답을 했던 것이 떠오른다. 훗날 두 사람이 창고에서 함께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 보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다. 그 무렵 케니스는 글쓰는 일에 안팎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클락은 그런 그녀를 두고 글을 좀 쓰는 여자애라던가, 범생이로 개심한 부류라는 둥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보통 애가 아니긴 하지. 총리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

아주 재미있는 비밀 얘기를 들려주겠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자긴 여자라서 총리는 못 되니까, 대신 총리가 될 남자애를 찾겠대. 적당히 머리 좋으면서 자기 말은 잘 듣는 남자애로 말이야. 남자 기숙사도 그래서 드나드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고는 겁을 주듯 “너도 조심해라.”하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왜?”

얼이 빠져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왜 총리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것이 되고 싶어한단 말인가? 당시에 나는 클락이 하는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얼굴이 지나치게 바보 같았던 모양이다. 나를 쳐다보며 이죽이던 클락은 잠시 후 바닥에 던진 돌을 도로 주워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엉겁결에 내가 말했다.

“그럼 너도 조심해.”

클락이 나를 돌아보았다. 뭐 그런 바보 같은 말을 다 하냐는 눈이었다.

“넌 내가 총리감으로 보이냐?”

그가 말했다.

 

 

4

케니스가 클락을 데리고 창고 안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당시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케니스가 클락의 손목을 붙잡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눈앞에서 끝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 장면에는 어딘가 외설적인 것이 있었다.

나는 잠정적으로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선 그 둘이 몰래 만나는 이유가 설명이 되질 않았다.

나를 비롯한 또래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나이쯤 먹으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단둘이 만나서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기가 어렵다. 그렇다. 그렇고 그런 일이란 섹스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나는 그 두 사람이 섹스를 하고 있으리라고는 쉽게 단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나에게 있어 섹스란 것은 남자와 여자가 벌거벗고 누워, 서로를 핥거나 주무르는 장면으로 구성된 이미지에 가까웠다. 섹스를 하는 남자와 여자는 항상 고통에 찬 것처럼 꿈틀대거나 신음하고, 그러다 보면 아기가 생기거나 지옥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 당시 우리가 가진 섹스에 관한 가장 강렬한 관념이었다. 나는 언젠가 미스 메이필드가 치마를 걷어 올린 채로 책상에 매달려 관리인과 적나라하게 뒤엉켜 있는 장면을 목격한 바 있었고, 거기서 벌어진 일을 토대로 해서 또래들 중엔 나름대로 섹스에 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쪽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케니스와 클락이 섹스를 하는 장면만큼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두 사람이 다른 꿍꿍이 때문에 만나는 쪽이 훨씬 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케니스의 건방진 태도가 이 가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그동안 나는 상급생 커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봐왔다. 여자아이들은, 처음에는 걸핏하면 말다툼을 벌이거나 자기 남자아이에게 대들다가도 때가 되면 미묘한 태도를 취하며 얌전을 떨기 시작하는데 그게 다 섹스 때문이었다. 그즈음부터 상대 남학생에게 벌컥 화를 내거나 팔을 꼬집는 그녀들의 행위는 전과 비슷해 보일지라도 훨씬 애교스러워져, 똑같이 다툼을 벌이더라도 일종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케니스에게는 그런 애교 따위가 없었다. 그녀가 클락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평소에 잘 만나지도 않았다. 멈추어 서서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하며 스쳐 지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케니스는 그렇게 여자애 같지도 않았다. 본인조차 그렇게 보이길 원하는 것 같았다. 레넌 코트에 입소할 적에도 남자애처럼 나달나달한 셔츠에 바지 차림이지 않았는가. 보통 남자애들보다 한 뼘은 더 큰 키는 깡마른 체격 때문에 더욱 부각되었다. 이름조차 남자아이 같았다. 교사들이 이름을 부른 다음 얼굴을 확인하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들여다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케니스 리드가 여자애라는 사실이 내 안에서 똑똑히 각인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레넌 코트에는 자선사업가를 대상으로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는데, 케니스가 입소한 다음 해에는 초여름쯤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우등생인 극소수의 아이들만이 그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선발된 아이들은 보육원을 후원하는 귀족들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그런데 케니스가 그중 하나로 선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교사들은 가급적 남자아이들을 더 많이 선발하려고 했지만 비슷한 연령대에서 읽고 쓰는 일은 여자아이들이 훨씬 더 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자아이들을 더 많이 선발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케니스가 그 수혜를 입은 것 같았다.

그 무렵 나는 교사에게 침을 뱉었다가 본관 외부에 비치된 쓰레기통 비우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자선사업 날에도 매 순간 방문객들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치우고 수시로 쓰레기통을 비우라는 명령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정원과 뒤뜰을 들락거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원에는 거대한 차양이 설치되었고 그늘에는 예배당에서 가져온 의자가 가지런히 배치되었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되자 활짝 열린 정문으로 마차와 리무진이 끝없이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케니스는 중간 가장자리 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옷을 잘 갖추어 입고 있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햇빛이 이동하며 만들어낸 절묘한 각도 아래서 케니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때문에라도 그녀는 눈에 띄었다. 단상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연설문을 낭독하던 후작 나리조차 잠깐 그쪽으로 눈길을 줄 정도였다. 그런데 케니스는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다소곳하게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지만 다리 각도는 비스듬했고 행사 내내 자꾸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단상 위로 월폴 자작이 올라왔을 때부터였다. 월폴 자작은 실은 이 보육원 사업에 직접적으로 투자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아내인데, 오늘 아내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본인이 대신 참석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 일처럼 모든 제안을 면밀히 검토하고 후원 사업 보고에 성실히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는 케니스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왜인지 케니스는 월폴 자작이 아내 이야기를 할 때 단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자세를 바로 하고 허공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연설이 끝나자 식사가 대접 되었다. 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시늉을 하면서 음식 찌꺼기가 보이면 재빨리 입에 쑤셔 넣거나 테이블보 아래에서 허겁지겁 맛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월폴 자작과 케니스 리드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흰 테이블보 아래로 나타난 반들반들하게 닦인 구두와 아까 들은 목소리 때문에 그가 월폴 자작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그 편지를 쓴 아이구나. 그렇지?”

케니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혼자서 쓴 거니?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걸 받아 적은 것이 아니고?”

“혼자 썼어요.”

“왜 그런 걸 썼지?”

“글쎄요. 제가 왜 그랬는지.”

케니스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해다오. 내가 편지를 읽길 바라고 쓴 것 아니니?”

“아니오. 그 편지는 부인에게 쓴 것이에요.”

케니스가 말했다.

“부인께서 화가 많이 난 거라면 사과드릴게요.”

월폴 자작은 잠깐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서류 가방을 내밀었다.

“마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런데 이것 좀 거기까지 들어주려무나.”

케니스가 가방을 받아 들자 그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이 정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얼른 테이블 밑을 빠져나왔다.

월폴 자작의 마차는 정문 부근에 주차되어 있었다. 검은 말 두 필이 묶여 있었고 차체는 멋스러운 붉은색이었다.

케니스가 월폴 자작에게 가방을 건넸다. 월폴 자작은 가방을 받는 대신 마차에 비스듬하게 올라 타 차체 안으로 몸을 반쯤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케니스 앞으로 불쑥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연두색에 가까운 흰 장미였는데 꽃다발에서 한송이만 막 꺾어낸 듯한 모양새였다. 케니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보고만 있자, 월폴 자작이 케니스의 손에서 가방을 낚아챘다.

“수고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침내 케니스가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꽃을 받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케니스는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으로 케니스가 취한 태도가 너무도 나긋나긋해서, 귀족 어른을 거절하는 중인데도 그렇게까지 무례해 보이지 않았던 게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케니스는 상대가 귀족 어른인 만큼 그런 태도가 최선이라는 판단을 나름대로 내렸던 것 같다.

케니스가 몸을 돌려 그곳을 막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월폴 자작이 그녀의 팔을 확 붙잡아 당겼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케니스의 몸은 부피감이 없는 가벼운 천처럼 휙 하고 들렸고 그 순간 두 다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케니스는 반사적으로 자기를 끌고 들어가는 그 팔에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월폴 자작의 팔이 케니스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아 바깥으로 뛰쳐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뒷좌석 창문으로 월폴 자작이 케니스를 꽉 붙들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을 보았다. 활짝 열린 마차 문 바깥으로 케니스의 두 다리가 뻗어 나와 있었다. 길고 깡마른 두 다리가 허공에 들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잠시 후 월폴 자작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케니스는 굳어 있던 자세 그대로 마차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마치 돌이 되는 저주에 걸렸다가 막 풀려난 사람처럼.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돌이 산산조각 나는 것과 같은 운명이 자신을 엄습하기 직전, 몸을 웅크려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케니스는 바닥을 짚은 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방금의 행동을 이해시켜줄 월폴 자작은 반대편 좌석 문을 통해 마차를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는 케니스를 놓아주자마자 재빠르게 정원에 마련되어 있을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마침내 케니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케니스에게 다가갔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케니스의 옷차림은 어수선하게 변해 있었다. 카라가 구겨진 채 위로 말려 올라갔고 셔츠는 오른쪽으로 크게 뒤틀려 어깨가 다 드러나 있었다.

“너 괜찮아?”

케니스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손을 내밀자 케니스는 신경질적으로 뿌리친 다음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자긴 멀쩡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서두르지 않고 카라를 잡아당겨 셔츠를 바로 하고 단추를 똑바로 잠그고 구겨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펼치는 그 행동이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불현듯 나는 케니스가 약해 보인다고 생각했고, 곧 그러한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케니스가 처음으로 여자애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왜 그런 거야?”

“뭐가?”

“월폴 자작 말이야. 너한테 반했대?”

그러자 케니스는 머리를 빗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아니. 저 남자는 그냥 한 거야.”

“그냥 했다고?”

“그래. 그냥 한 거라고, 얼간아.”

그렇게 내뱉은 다음, 케니스는 돌연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든 데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렇지만 편지를 주고받았잖아?”

“난 저 사람한테 편지 쓴 적 없어. 부인한테 쓴 거지.” 케니스가 쏘아붙였다.

“그런데 갑자기 저 사람이 찾아온 거야. 대신 읽은 건지 어쩐 건지는 나도 몰라.”

케니스는 보육원을 후원하는 귀족 부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러다 중간부터 마음을 바꿔서 자기가 쓴 소설 일부를 옮겨 적었다고 했다. 음란한 소설이었다고 했다. 여자랑 남자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부분을 세세하게 묘사한 장면이었다. 케니스는 자기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왜 그런 걸 쓰는데?”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화가 나서.”

케니스가 대꾸했다.

“근데 이제는 안 할 거야.”

“왜?”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가 없어졌으니까.”

나는 이날 목격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월폴 자작이 케니스를 마차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장면은 그녀에 대한 나의 인식을 한 차례 바꾸어 놓았다.

나는 케니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서히 다시 보게 되었다. 케니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녀 주위를 알짱거리거나 흘끔거리는 남자들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제법 많은 남자아이들이 케니스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까지 케니스는 별로 눈에 띄는 여자애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니, 케니스뿐만이 아니었다. 또래 여자아이들은 갑자기 변했다. 그들은 느닷없이 남자들이 사족을 못 쓰게 만드는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외출을 하면 거리의 남자들은 설령 다른 일을 하는 중이었다 할지라도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치 손 쓸 도리 없는 힘의 작용이 긴 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 실의 끝에는 여자아이들의 몸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들이 줄을 당길 때마다 남자들이 소시지처럼 줄줄이 딸려오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의 가슴이 점점 풍만해지고 몸이 갓 구운 빵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자, 남자들은 그 앞에서 대놓고 겸연쩍게 굴었다.

나는 케니스가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준 나긋나긋한 태도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케니스는 진작부터 이러한 힘의 작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여자아이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부터 혼자 그러한 힘을 끌어내는 말과 행동을 꾸며내며 남자아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월폴 자작도 그런 케니스의 힘에 이끌린 것 같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케니스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겠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케니스가 클락을 창고로 불러들일 수 있는 것도 다 그 힘 덕분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케니스는 분명 그 힘으로 무엇이든 끌어들일 것이었다. 한편으로 월폴 자작의 마차 안으로 끌려 들어간 케니스를 떠올리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그 순간에만큼은 케니스가 약하게 느껴졌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케니스가 클락의 손목을 붙잡고 창고 안으로 사라진 다음 일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케니스와 클락이 뒤엉킨 장면을 상상하고 있으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창고로 돌아가서 두 사람을 훔쳐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제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여태껏 나는 대담하고 강인한 아이였는데, 이제는 무지렁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섹스와 여자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클락은 진작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우리 중 누구도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뿐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한 행동을 대담하게 해치운 지 오래였다. 알고 보니 그는 우리 중에서 진실로 뛰어나고 성숙한 남자아이였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혼란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점점 떨치기가 힘들었다. 특히 키에 관한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또래 남자아이들은 슬슬 키가 크고 있었는데 나는 도통 자랄 기미가 없었다. 거시기나 겨드랑이에 털도 나지 않았다. 반면 나와 달리 벌써 면도를 시작한 녀석들은 곧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남자아이들은 자기가 꾼 음란한 꿈을 길조처럼 떠들고 다니면서 나 같이 발육이 늦은 아이들을 깔보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음란한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창고에 있었다. 수납장 안에 앉아 작은 틈으로 바깥을 훔쳐보며 시작되는 꿈이었는데, 처음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다. 다음 순간 문이 열리더니 케니스와 클락이 차례로 들어왔고 주변에 낡은 매트리스와 버려진 책걸상 따위가 생겨나면서 그곳이 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케니스와 클락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의 동향을 살피다가 킬킬 웃어댔다. 두 사람은 창고 안에 내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클락이 케니스를 밀치며 입을 맞추었다. 클락은 여자애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뻣뻣하게 서 있던 케니스는 입맞춤 한 번에 녹아 내렸다.

두 사람은 낡은 시트 위로 쓰러져 뒹굴었다. 클락이 케니스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케니스는 몸을 뒤틀며 그를 도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야릇한 소리를 내며 두 팔로 클락을 휘감았다. 케니스가 음란한 소리를 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올랐다. 클락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케니스를 거칠게 몰아붙였고 잠시 후 케니스에게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순간 나는 클락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케니스가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자아이를 휘어잡는 클락의 힘에 도취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클락을 유혹하는 알 수 없는 힘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클락이 마침내 케니스의 윗도리를 다 벗겼다. 그런데 정작 드러난 케니스의 맨 가슴이 납작하고 판판했다.

어느새 나는 클락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케니스는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고 있었다. 처음 레넌 코트에 왔을 때처럼 말이다. 수더분한 단발에 긴 눈을 가진 케니스는 그 순간 남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신음을 내뱉는 케니스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악의가 있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눈빛이었다. 나를 놀리는 눈빛이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외쳤다.

“여자애로 돌아가! 당장 돌아가란 말이야!”

그러자 케니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조차 모르는 내 일면을 자기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케니스가 나를 끌어안는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말았다.

나는 꿈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키가 자라고 거시기에 털이 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며칠 뒤 나는 창고로 향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간 입구 앞에 가만히 서서 창고를 둘러보았다. 창고는 생각보다 넓고 텅 비어 있었다. 몸을 숨길만 한 수납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낡은 매트리스나 카펫 같은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이 몸을 눕힐 만한 장소를 찾아 나는 점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꿈속에서 본 듯한 지점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마룻바닥 한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부분만 못질이 없었다. 끄트머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바닥 한쪽을 뜯어내자 감춰져 있던 조그만 공간이 드러났다. 단어를 연습할 때 쓰는 줄 공책 두 권이 그 속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었다.

나는 공책 끄트머리로 빠져나온 한 뭉치의 쪽지를 보았다. 삐뚤삐뚤 힘주어 써 내려간 글씨와 멋을 부려 휘갈긴 얇고 널찍한 글씨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나는 힘을 주어 삐뚤빼뚤 써 내려간 글씨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클락의 글씨체였다.

 

 

 

그 무렵 남자아이들이 담을 넘나들며 보육원 바깥일에 개입하기 시작했던 게 기억난다. 처음 부추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앞다투어 몰래 외출하려 들었다. 클락 역시 대체로 그런 무리에 껴 있었고 혼자 외출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클락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받은 ‘죄수복’ 소매와 바짓단은 지나치게 짧아진 지 오래였다. 클락은 발목이 다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다 해진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 높은 담을 능숙하게 오르내렸다. 주변 아이들은 전부 그를 남자로 취급했다. 이제 클락은 우리 중 두 번째로 키가 컸고 주먹질도 잘했다. 클락은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 모습은 종종 주변 아이들을 덩달아 고무시켰다.

클락과 클락을 따르는 아이들은 점점 바깥으로 나돌았다. 나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실제로 몇 번 낀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불러주는 일원으로는 취급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가다 말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클락과 마주쳤다. 내가 당황해서 물었다.

“너 수업은?”

클락은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그런 걸 듣겠냐?”

“단어 수업인데도 안 듣는 거야?”

“그게 뭐?”

“너 이 수업은 꼭 들었잖아.”

클락은 그제야 무언가 떠올린 것 같았다. “아아.”하고 길게 말을 끌다가 귀찮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너 나중에 케니스를 보게 되면 걔한테 오늘은 안 될 것 같다고 전해줘라.”

“어디 가는데?”

“몰라. 그건 뱅크스가 알아서 하겠지.”

그 순간 나는 클락이 오늘 외출할 일원으로 나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부탁을 들어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거면 돼?”

“그래.”

“걔가 화내면 어떡해?”

그러자 클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한 대 쯤 맞아주던지?”

그렇게 해서 나는 단어 수업을 빼먹고 홀로 여자 기숙사로 향했다. 하지만 케니스는 그곳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텅 빈 기숙사를 맴돌다가 본관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기둥 사이로 창백한 햇빛이 떨어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정원을 지나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케니스가 반대편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후 케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하는 얼굴이다가 이내 ‘아, 너였군’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 오늘은 안 될 것 같다고 씨씨가 전해달래.”

케니스는 책을 덮었다.

“왜?”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무슨 할 일?”

케니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애는 알 거 없어.”

“퍽이나.”

케니스는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는 밖에서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 순간 욱하긴 했지만, 나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우린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거야. 그러는 너야말로 씨씨랑 창고에서 대체 뭐 하는 거야?”

케니스의 동작이 잠깐 멈추었다.

“씨씨랑 사귀는 거냐?”

내가 물었다.

“그렇게 보여?”

“아니.”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야?”

나는 뜸을 들였다.

“사귀는 것도 아니면 씨씨를 좀 내버려 두지 그래. 걘 대단한 애란 말이야.”

그러자 케니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걜 꼬셔서 창고로 데려가는 짓은 그만하라고.”

“그거 말고. 넌 왜 씨씨더러 대단하다고 하는 건데?”

처음으로 케니스는 나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추궁하듯 몰아붙이는 태도가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잘은 모르겠지만 케니스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좋은 기회다 싶어 그동안 클락이 우리 사이에서 얼마나 활약해 왔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를테면 클락이 미스 메이필드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가며 서류를 훔쳤다 돌려놓는 재주가 우리를 얼마나 매료시켰는지를 설명했다.

처음 그 능력을 목격했을 때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클락은 언제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어른들을 골탕 먹일 수 있었다. 물건을 감추는 손놀림은 또 어찌나 빠른지. 담력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지….

케니스는 곧 내 말에 흥미를 잃었다. 번쩍이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그녀는 나를 경멸하듯 보고 있었다.

“그게 대단하다는 거야? 그건 구제 불능이라고 하는 거야.”

“넌 뭐 얼마나 잘났다고?”

내가 화가 나서 대꾸했다.

“야, 네가 뭐라고 하던 간에 남자애들은 다 알아. 클락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조금만 지켜봐도 모를 수가 없거든.”

“클락 캄벨은 그냥 얼간이야. 너희랑 똑같아.”

케니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바보 천치지.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거니까.”

“네가 이렇게 건방지니까 씨씨한테 버림 받은 거야.”

내친김에 진실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충고하듯 말했다.

“아까 나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할 때도 걔가 얼마나 귀찮아 했는지 아냐?”

케니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걔가 날 왜 귀찮아해?”

“도움이 안 되니까 그렇지.”

“씨씨가 그랬어?”

“딱 봐도 그렇잖아. 솔직히 너 같은 애랑 노는 게 뭐가 재밌겠냐?”

케니스는 잠깐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결연한 태도를 취하며 방어적으로 말했다.

“나랑 있는 게 재미야 없겠지. 사실 자긴 그냥도 못한 남자애니까. 근데 나만큼은 그걸 알고 있으니까! 너희가 띄워주는 말에 취해서 얼간이처럼 굴고 있지만 난 알아. 클락 캄벨은 별것도 없는 남자애고 평생 그렇게 살 거야. 게다가….”

돌연 케니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나도 덩달아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언제 온 건지 클락이 삐딱한 자세로 난간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케니스가 자길 노려보기 시작하자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려 보였다.

클락은 뻣뻣하게 서 있는 케니스를 지나쳐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색하게 뒤로 물러나던 케니스는 무시당한 것을 깨닫자 표정을 굳혔다. 클락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치켜들면서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꼭 케니스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누가 너 만나러 왔대?”

클락이 웃기다는 투로 말했다.

무언가 말하려던 케니스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날카로운 인상을 주던 눈빛이 아니라 어딘가 힘이 빠진 듯한 눈빛이었다. 잠시 후 케니스는 홱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코너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클락은 그런 케니스를 붙잡지 않았다.

“뱅크스가 한 자리 빈다는데 너 갈 생각 있냐?”

나는 클락의 손에 작은 쪽지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클락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갈게.”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벽에 기대어 정원을 쳐다보는 클락은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이라곤 없는 이 세상에 그만 흥미가 다 떨어졌다는 얼굴이었다.

 

 

5

시간이 갈수록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 간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여자아이들은 우리를 경박하게 여기며 최대한 피해 다녔고 우리는 그런 여자아이들을 젠체한다고 싫어했다.

보육원 방침상 우리는 여자아이들과 만날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전보다 겹치는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과 마주치는 건 점심과 저녁 시간에 함께 식당을 사용할 때와 단체 예배 시간 때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여자아이들을 곤란하게 만들려 애를 썼다. 교사들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한 다음, 큰소리를 내며 끼어들거나 예쁘장하게 땋아 올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낄낄거렸다. 그럴 때마다 여자아이들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으며 어른들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우리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여자아이들이 고자질을 하면 독방에 끌려가 매를 맞게 될 걸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분노를 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로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이에서 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던 시기였다. 고만고만하게 느껴졌던 여자아이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갖추고 뚜렷한 존재감을 발산하기 시작하자, 아닌 척해도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에 이끌렸다. 특히 케니스는 갑자기 주목 받는 존재가 되었다. 남자아이들 중에 케니스를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케니스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는 빨간 머리카락치고 드물게 곱슬거리지 않는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수더분했던 짧은 머리카락이 어느덧 어깨까지 길게 자랐는데 케니스는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기고 다녔다. 케니스가 걷고 있으면 타오르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출렁거렸고 남자아이들은 케니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려고 음란한 말을 던지면서 그녀의 주의를 끌어댔다. 하지만 케니스는 평소 조용한 성격인 데다 소동에 휘말릴 것 같으면 재빨리 자리를 피해 버리는 얌체 같은 면모를 가졌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빈번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남자아이들은 케니스가 지나치게 정숙한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케니스와 클락 간의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클락은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에서 보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보육원 근처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죽였다. 클락은 더는 케니스와 쪽지를 주고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단둘이 창고에서 만나는 일도 없어 보였다.

그 무렵 우리는 저수지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저수지는 더는 공포의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를 처벌하던 상급생들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 그곳은 유용한 장소로 변한 지 오래였다. 우리는 수심이 깊은 곳까지 수영하며 모험심을 뽐내거나 저수지 중심지로 배를 끌고 나가서 잠수 대결을 펼치며 서로의 담력을 겨루곤 했다. 잠수 대결을 할 때 쓰는 배는 관리인이 사용하는 조그마한 쪽배였는데 평소에는 저수지 끝에 묶여 있었다.

쪽배는 서너 명 정도만 간신히 탈 수 있는 정도로 아주 작은 크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며 두어 명 정도만 배에 탔다. 잠수 대결 규칙도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보완되었다. 심판을 볼 사람과 참가자가 저수지 중심부까지 나아가 적당한 장소에 배를 세우면, 나머지 사람들은 물 밖에서 큰 소리로 “뛰어들어!”하고 외쳤다.

참가자가 물로 뛰어들고 나면 다 같이 초를 셌다. 그동안 심판 보는 아이는 참가자가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붙잡아 누르고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더는 안 되겠다는 항복 표시를 받아내기 전까지 절대로 봐줘서는 안 됐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이 대결의 묘미는 숨을 오래 참는 정도로는 절대 우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제로 머리가 짓눌리는 공포를 견디면서 발이 닿지 않는 깊고 어두운 물 속을 오래 버텨내야만 자신의 담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대결은 우리 사이에서 지극히 안전한 놀이로 여겨졌다. 상급생들이 화풀이를 하려고 우리를 물 속에 집어 넣었을 때는 언제 건져 올려질 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지만 대결을 하는 중에는 언제든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두렵기는 했어도 한편으로 공포를 정복하고 있다는 생각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우리는 잠수 대결이 주는 스릴에 도취되어 밥 먹듯 저수지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여자아이들이 떼를 지어 저수지로 내려왔다. 놀러 나온 것인지 아니면 빨래나 다른 용건이 있었던 것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잠수 대결을 하기 위해 먼저 저수지로 내려와 있었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사건이 하나 있다. 불과 며칠 전 평소 여자아이들에게 깐족거리길 좋아하는 뱅크스와 주변 녀석들이 여학생들과 크게 다툰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 장소에 있었다. 점심시간이었고 우리는 막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때 나는 뱅크스의 무리에 어정쩡하게 껴 있었다. 지난번 외출을 계기로 어쩌다 보니 그들과 섞이게 되었는데 뱅스크와 그렇게 어울리게 된 것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그들 무리가 나를 썩 달가워 하는 것 같지 않아서 평소보다 훨씬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설렁설렁 걷던 뱅크스는 나무 아래에 모여 있는 여학생들을 보고 멈추어 섰다. 뱅크스는 곧장 별다른 이유 없이 여자아이들을 향해 저속한 농담을 던졌다. 남자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여자아이들은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노려보았다. 이때 나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다 함께 웃어야 하는 타이밍에 나무 위쪽을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가지 사이로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케니스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무 위를 유심히 응시하다가 뒤늦게 뱅크스를 의식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뱅크스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지 오래였다. 실수를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해 졌을 때였다. 뱅크스가 말했다.

“봐, 쟤네가 우리를 노려보잖아.”

그 말을 시작으로 남자아이들이 낄낄대며 여자아이들을 향해 음란한 말을 던져댔다. 내가 느끼기엔 다들 여자아이들의 눈초리에 내심 겁을 먹었지만 그런 기분을 몰아내기 위해서 더욱 큰소리로 요란을 떠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어렸고 그런 느낌을 구분해 내기란 무척 어려웠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뱅크스는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내게 눈짓을 주었다.

나는 여자아이들을 향해 저속한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충분히 않았는지 뱅크스는 비웃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뱅크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른 남자아이들도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점점 수위를 높여가며 여자아이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고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나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남자아이들이 추임새를 넣어가며 짐승처럼 환호하기 시작했다.

“해 버려!”

“꽤 하는데!”

“조, 말해! 계속 말해!”

그 무렵 우리는 하루 종일 섹스 얘기를 했다. 침대에 누워서는, “아까 그 침 뱉은 여편네의 빨통을 제대로 주물러 줬어야 했는데.”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면서는, “이렇게 쏘면 여자들은 사족을 못 쓰게 돼 있어.” 주먹다짐을 구경하다가는, “그 정도 주먹이면 차라리 계집애처럼 필립의 물건을 핥아줘야 할 거야.”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강한 어조를 사용했고, 외설스러운 단어일수록 일부러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렇게 하면 갑자기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감정을 똑바로 처리하는 법을 알 필요가 없었다. 우리를 은근하게 경멸하는 귀족 대학생들과 훈육을 핑계로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며 분을 표출하는 보육원 어른들로부터 받은 것이 모욕감인지, 상처인지, 머쓱함인지,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는 구분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미래를 향한 현실적인 두려움, 자기 자신이 조로하고 하찮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일이 막연한 문제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남자란 것은 자기 구실만 할 수 있으면 되었다. 여자와 섹스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나의 물건이 여자의 육신에 얼마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가 체면의 문제로, 궁극적으로는 농장을 살 수 있는가, 직업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내를 가질 수 있는가, 가정을 만들 수 있는가, 인생이라는 것을 건설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의 증명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것이 훨씬 쉬운 길이었다.

우리는 또 다시 쉬운 길을 선택한 참이었다. 그 길이 가르쳐주는 방향대로 행동하면서 강하게 몸을 부풀리고 불안을 잊기 위해서 여자아이들을 모욕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쟁취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사실을 내가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느낌은 너무도 희미하고 가느다래서 나를 충분히 지켜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내가 내뱉는 욕설에 호응할 때마다 닥쳐오는 안도감이야말로 진짜처럼 생생하고 강렬했다. 그 순간엔 정말로 그렇기는 했을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건들거리면서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여자아이들은 일제히 몸을 굳혔다. 실 없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고개를 숙였다. 심기 불편한 눈빛을 주고받던 여학생들은 결국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났다.

남자 아이들은 신나서 괴성을 질러댔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섹스에 대해 고함을 치듯 얘기했다. 그 때 갑자기 케니스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여태까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던 케니스였지만 그날만큼은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케니스는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남자아이들 쪽으로 내달렸다. 그러고는 곧장 뒤쪽에 서 있던 뱅크스를 바닥으로 밀치며 덤벼들었다.

비교적 조용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던 뱅크스는 갑작스러운 봉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케니스는 틈을 주지 않았다. 뒤로 넘어진 뱅크스의 멱살을 틀어쥔 다음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케니스는 다른 여자아이들이 화가 났을 때 그러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뺨을 내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주먹을 쥐고 볼록한 손마디 부분으로 뱅크스의 눈과 코를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그녀는 싸우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같은 곳을 무자비하게 내려치면서 뱅크스의 두 어깨를 무릎으로 짓누르는 모습이 놀라울 만큼 냉정했다. 이러다 정말로 뱅크스가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케니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매섭게 몰아붙였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광경에 남자아이들은 크게 당황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덤벼드는 상황을 가정해 본 적이 없었다. 체격 차 때문에 점차 밀리고는 있었지만 케니스는 뱅크스와 거의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몸이 뒤집히는 순간 끝장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케니스는 뱅크스의 얼굴을 무릎으로 깔아뭉개면서 마지막까지 주먹을 꽂아 넣었다.

마침내 뱅크스가 있는 힘껏 케니스를 밀어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얼굴이 이미 엉망진창이었고 체면도 다 구긴 상태였다. 그는 흥분한 나머지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을 했다. 케니스의 머리를 붙잡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리 꽂은 것이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케니스는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즉시 여자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교사를 부르러 달려갔고, 싸움은 거기서 끝났다.

케니스는 얼마 가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깨어났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다음,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깔보듯 찬찬히 훑어보았다. 떨리는 팔과 비틀대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가, 치마를 툭툭 털며 일어나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그러고 나서 남자아이들을 쏘아보았다. 미스 메이필드가 다가와 케니스의 팔을 잡아 끌었다.

끌려가는 동안에도 케니스는 우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런데 정작 여자아이들을 향해 가장 격렬한 욕설을 퍼부었던 나에게만큼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케니스의 행동이 어쩐지 나는 비참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면서 뱅크스의 이야기를 들먹였다. 케니스가 뱅크스를 때려눕혔다는 소식은 곧 보육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며칠간 뱅크스는 이를 갈면서 케니스를 죽이려 들었다. 독방 처분만 아니었어도 분명 일이 터졌을 것이다. 하지만 뱅크스가 독방을 나왔을 땐 한창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잠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잠수 대결에 푹 빠지게 된 뱅크스는 케니스를 손봐주겠다는 야심을 뒷전으로 미루어 버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필 뱅크스 무리와 여자아이들이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수지로 내려온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케니스가 껴 있었다. 케니스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그날 사건이 케니스를 향한 여자아이들의 감정에 무언가 영향을 준 것 같았다.

평범하게 또래 아이들 틈에 섞여 있는 케니스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뱅크스는 케니스를 보자마자 입매를 비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수 대결 때문에 서서히 잊혀지고 있긴 했지만 뱅크스는 공식적으로 여자아이에게 두들겨 맞은 유일한 남자아이였고, 그 바람에 싸움꾼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훼손되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복수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케니스는 여자애였기 때문에 비록 이전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녀를 주먹으로 손봐주는 건 수지에 맞지 않았다. 뱅크스는 케니스에게 잠수 대결을 제안했다.

“그게 뭔데?”

케니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간단해. 배를 타고 저기까지 가서 숨 좀 참다가 돌아오면 돼.”

규칙을 설명하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곧장 반발이 터져 나왔다. 여자아이들은 케니스가 싸움을 건 건 뱅크스네가 먼저 자기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므로 케니스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케니스는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뱅크스와 남자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여자아이들을 위협하면서 케니스가 응하지 않으면 너희를 닥치는 대로 때리겠다고 했다.

독방에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했다. 독방을 나와서도 보육원을 졸업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찾아가서 괴롭히겠다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케니스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이에 질세라 그런 짓을 하면 교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 두 집단 간 증오가 점점 고조되면서 공기가 팽팽해지던 찰나였다.

“잠수만 하고 돌아오면 되는 거야?”

여자 아이들이 말리려 들자 케니스는 귀찮은 기색으로 그 손길들을 모조리 밀어냈다.

“난 너희 때문에 싸운 게 아니야.”

그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60초만 넘기면 인정할게.”

뱅크스가 봐준다는 투로 제안했다.

“심판 보는 애는 누가 정하는데? 네가 심판이야?”

뱅크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똑바로 할 지 안 할 지 어떻게 알아?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

“그럼 네가 고르던지?”

“남자애들 중에서?”

“그럼 내가 여자애들더러 심판 보라고 하겠냐?”

케니스가 앞으로 나왔다. 뱅크스 무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케니스와 눈이 마주치면 고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뱅크스 무리가 아닌 녀석들도 있긴 했지만 남자아이들의 위신을 꺾어놓은 케니스를 봐주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케니스는 오래 살펴보지 않았다. 한순간 나는 케니스가 나를 지목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되면 어쩌나 싶은 찰나에 케니스가 정말로 내 쪽을 가리키는 일이 벌어졌다.

케니스가 지목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뒤편에 앉아 있던 자신의 고아원 동기였다. 소란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아 얼른 잠수 대결이 진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클락 캄벨은 케니스의 지목을 받자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니스와 클락 간의 친분을 전혀 모르는 남자아이들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클락은 우리 사이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심판이었다. 클락은 두려워서 안 된다고 하는 때와 정말로 안 될 때라는 걸 구분할 줄 알았다. 설령 참가자가 항복 의사를 표현했더라도 거기서 더 갈 수 있다고 판단하면 클락은 물 속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어떤 때 보면 클락은 순전히 재미 때문에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클락은 뱅크스 무리에게 혹독하게 굴었는데 뱅크스와 그토록 잘 붙어 다니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나라면 보복이 두려워서 그런 짓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한때는 클락이 사실 뱅크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는 뱅크스 무리와 어울리는 동안에도 어딘가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클락은 뱅크스를 재미있게 여기는 것 같긴 해도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누구에게나 그랬다. 그런 클락의 냉소적인 면모를 아이들 모두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잠수 대결에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모습도 클락의 그런 냉정한 일면을 반영했다. 여자아이에게 가장 자비 없이 굴 수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우리는 복수에 혈안이 된 뱅크스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클락을 꼽을 것이었다. 케니스가 클락을 지목하자 뱅크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얼른 대결을 진행하려고 했다. 뱅크스는 케니스가 클락에게 제대로 혼쭐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나는 케니스와 클락이 보이는 것보다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 무렵 두 사람은 전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 케니스가 클락을 지목한 건 도박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특히 케니스가 홧김에 저주를 내뱉는 바람에 클락의 원한을 사고 만 것이 마지막이었다면 말이다.

“60초였던가?”

클락이 물었다.

“씨씨, 봐주지 그래.”

“40초만 담가도 엉엉 울 걸.”

남자 아이들이 낄낄거렸다.

클락은 겉으로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막상 배에 탈 순간이 되자 케니스는 긴장한 것이 보였다.

“그래. 딱 60초야.”

케니스가 대답했다.

여기서부터 나는 케니스의 시점으로 상황을 되짚는다. 사실 케니스는 배를 타기 전부터 겁을 먹은 상태였다. 옛정을 기대하며 클락을 지목하긴 했지만, 클락의 태도는 생각한 것보다 더 아리송했다. 클락이 눈치껏 자기를 도와줄 수도 있겠다는 케니스의 믿음은 점점 의심으로 바뀌어 갔다.

배는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조막만 했다. 작은 물살에도 크게 요동치면서 돌이나 부둣가 따위에 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케니스가 보기에 별로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클락은 케니스가 조심스럽게 배 위로 발을 뻗을 때도 가만히 서서 케니스가 하는 모양새를 구경만 하다가, 케니스가 배에 올라타는 순간 자기도 그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배가 크게 흔들리고 사방으로 물이 튀어 올랐다. 균형을 잃은 케니스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케니스가 노려보자 클락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요동치는 배 안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 난간에 노를 걸쳤다.

마침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흥분에 찬 남자아이들의 고함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케니스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노를 저을 때마다 배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이따금 노가 뱃머리에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둔탁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자, 클락이 배를 세우고 노를 끌어 올렸다. 뻣뻣하게 앉아 있던 케니스가 물었다.

“이제 수업은 안 듣기로 작정한 거야?”

“누가 들으면 되게 모범생인 줄 알겠다? 원래 안 들었거든?”

“그거 말고.”

케니스가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그 수업 말고… 다른 거 말이야.”

클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뭐 열심히 불렀냐? 우리 둘 다 기분 내킬 때만 하던 거잖아. 이제 와서 뭘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그럼 너 이제 다 포기한 거야?”

케니스가 의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부 관둘 생각이야?”

클락은 부둣가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들이 클락을 향해 무어라 고함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날따라 배를 너무 멀리까지 몰았던 것이다.

“뭐라는 거야.”

피식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케니스를 내려다 봤다.

“잠수할 시간이야, 케니스. 다들 기다리는 중인 거 안 보이냐?”

케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하면 날카로운 시선을 비수처럼 꽂아 넣어 어둠 속에 감추어진 연약한 진실을 바깥으로 밀려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클락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녀의 시선을 가소롭다는 듯 받아칠 뿐이었다. 케니스의 그런 얼굴이 클락에게는 너무도 익숙했을 것이다.

“얼른 들어 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가던지?”

케니스는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갈 거야.”

케니스가 위태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지만 수면은 잔잔했다. 부둣가를 한 번 쳐다본 다음,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발 한쪽을 조심스럽게 수면 위로 뻗었다. 물은 새까맣고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유심히 수면을 들여다보던 케니스는 잠시 후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저수지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즉시 몸을 덮쳤다. 허우적거리며 물 위로 떠오르자 클락의 손이 케니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케니스가 다급히 그 손을 붙잡았다.

“40초로 해.”

“싫은데?”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클락의 손이 케니스의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았다.

“대결은 공정해야지.”

다음 순간 클락이 케니스를 강제로 물 속에 집어 넣었다.

차가운 물살이 한순간 솟구쳐 오르며 케니스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치마가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케니스는 화를 가라앉히고 속으로 초를 세면서 냉정하게 생각하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락이 눈치껏 봐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남아 있던 것이다. 남자아이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쌀쌀맞게 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클락은 그렇게까지 비정한 아이가 아니었다. 봐 달라는 제안에 당장은 심술이 동한 상태라 할지라도 그 정도만으로 클락이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려놓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부류는 못 되었다.

먹먹해져가는 귀와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견디면서 케니스는 40초를 세어 나갔다. 그런데 불현듯 헤엄치는 동작을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따라 클락이 배를 멀리까지 모는 바람에 케니스가 빠진 지점은 저수지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었다. 다리를 버둥거릴 때마다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 공포감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케니스는 물 속에서 유달리 더 창백하게 질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깡마른 두 다리가 컴컴한 밑바닥과 대조적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래는 어둠뿐이었다. 가라앉으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공포에 사로잡히기 직전, 클락의 손이 케니스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손은 케니스를 세게 짓누르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클락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정말로 공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케니스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쌓아 온 신뢰 관계도 그렇게까지 대단치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케니스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케니스는 물 밖으로 팔을 뻗었다. 손을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틀어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클락이 중심을 잡으려고 다급하게 힘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클락을 끌어당기면서 그 힘으로 물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 케니스는 자신이 클락의 윗도리를 붙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한 번 당해 봐.’

온 힘을 다해 잡아 끈 순간, 짧은 탄식과 함께 마침내 클락이 물 속으로 떨어졌다.

물거품이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한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케니스는 클락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내렸다. 수면이 요동치고 빛무리가 얼굴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케니스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긴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듯이. 클락은 일종의 배신을 했다. 그렇다. 배신이다. 고작 자존심 때문에 클락 캄벨은 지난 몇 달간 두 사람이 해왔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케니스는 예감했던 것도 같다. 어쩌면 지난 몇 주 동안은 케니스 자신이 그런 척을 하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월폴 자작이 몸을 더듬는 한순간 모든 것을 탁 하고 놓아버린 나머지 클락을 다시 창고로 불러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은 채로 사이가 점점 벌어져 가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실은 공부를 계속해 나가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을 치명적으로 상처 입힐 수 있는 건 그런 일들뿐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아그네스 원장이 말한 대로 살게 될 것이다. 운 좋게 직업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몇 푼 벌어먹지 못하고 점차 병들어 죽어갈 것이다. 칼에 찔리거나, 마차에 치이거나, 공장 기계에 끼인 채로. 피를 흘리면서, 작은 신음을 내뱉으면서, 길거리에서, 항구에서, 골목 어귀에서 불현듯 사라지고 말 것이다. 좋은 일들은 번쩍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빛무리와 같지만 나쁜 일들은 대체로 인생을 질질 끈다. 불타버린 집과 고아원을 떠나오면서 케니스는 맹세했다. 다시는 삶에 기대를 걸지 않겠노라고. 이 순간에 그녀가 느끼는 것이 고통이라면 그건 인생의 진리를 다 깨우친 대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케니스는 깨닫고 말았다. 미래에 아무런 희망도 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기대를 걸어버렸다는 사실을. 클락과 함께 창고에 앉아서 공부하던 시간을 의미 있게 여기고 말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러했다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그 시간을 위해 매번 창고로 돌아왔던 클락 역시 그럴 것이라 믿어버렸다는 잔인한 사실을 말이다.

그 믿음을 건 대가로 이제 그녀는 캄캄한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케니스는 자신을 어둠 속에 집어넣은 클락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을 케니스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녀는 클락이 고통받기를 바랐다. 두려워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을 모를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다!

그런 다음, 케니스는 클락의 두 눈을 보았다. 한순간 그녀는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클락이 조금도 겁에 질리거나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케니스도 아닌 케니스의 어깨 너머로 저수지의 깊은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케니스가 고통을 느끼던 말던 그것은 클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클락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토록 실망스럽고 분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이런 감정은 케니스를 망가뜨리고 말 것이다. 약한 아이로 돌려놓고 말 것이었다. 아니, 그녀는 벌써 자신을 유지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클락의 새카만 두 눈동자를 마주 보던 케니스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다 말고 그만 산산이 부서져 급류에 휩쓸리듯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것은 휙 하고 잡아끄는 손길보다 강력한 힘이었다. 알고 보니 클락이 응시하던 것은 캄캄한 저수지 속 어둠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그보다 더 먼 지점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해서 마침내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곳은 너무도 춥고 공허해서 아무리 격렬한 감정이라도 점차 미미해지다 못해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 듯 한 깊은 고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케니스는 곧장 겁에 질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꺾인 자존심, 초라한 외로움은 그 공간 속에서 무의미했다. 그러한 공허감을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얼른 자신을 되찾아야 했다. 설령 그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되살리는 수밖에 없다고 해도. 결국 고통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지라도. 그 순간 발밑에서 새빨간 화염이 타올랐다.

그것은 케니스도 잘 알고 있는 불이었다. 케니스와 클락의 한 시절을 빼앗아 간 화염이었다. 스프링필드를 무너뜨린 화재인 것이다. 갑작스러운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란 케니스는 그만 불에 덴 듯 황급히 클락을 떨쳐내고 말았다.

클락은 곧장 기포를 내뿜으며 물 위로 솟구쳤다. 한동안 수면 위에서 호흡을 정비하던 클락은 케니스가 올라올 기미가 없자 다시 잠수했다. 그러고는 가라앉기 시작한 케니스를 물 밖으로 끌어냈다.

물 위로 떠오른 케니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클락은 부둣가 쪽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두 사람이 떠오를 기미가 없자 혼비백산한 여자아이들이 보육원으로 달려가고, 그런 여자아이들이 일을 키울까 봐 남자아이들이 뒤이어 쫓아가면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후였던 것이다.

클락은 케니스의 상태를 살폈다. 케니스는 기진맥진한 것 같았다. 우선 둘 다 물에서 나가야겠다고 판단한 클락은 기우뚱거리는 배의 난간을 잡고 절묘하게 무게를 실은 다음 재빠르게 올라탔다. 그러고는 곧장 케니스를 배 위로 끌어올렸다. 몇 번 미끄러지자 아예 허리를 붙잡아 안쪽으로 잡아끌었다.

마침내 배로 올라온 케니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녹아내릴 듯 주저앉았다.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클락을 향한 배신감이 서서히 되살아 났다. 기운을 차리는 대로 케니스는 분노의 말을 퍼부을 작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은 끝까지 케니스의 편이 돼 주지 않았다. 느닷없이 불어온 강한 서풍에 뒤집힐 듯 크게 요동치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케니스는 얼마 못 가 클락의 품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클락이 어정쩡한 자세로 케니스를 붙잡았다. 잠시 후 수면이 잠잠해지고 흔들림이 멎었다. 케니스의 팔이 클락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고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가깝게 붙어 있었다. 황급히 떨어지려던 케니스는 동작을 멈추었다.

진실로는 클락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클락의 두 눈을 통해 목격한 어둠이 저수지의 것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한순간 자신을 사로잡은 화염 역시 스프링필드를 전소시킨 그날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 화염은 스프링필드의 불꽃이 맞는 것도 같았다. 눈물 흘리지 않았을 뿐 그날의 사건은 케니스뿐 아니라 클락을 할퀴기도 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불꽃은 매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것이기도 했다. 그 불꽃은, 빼앗길 바에야 모조리 태우고 말겠다는 마음가짐. 세상의 어둠을 들추며 보복하듯 달려오는 결의에 가까운 태도였다. 케니스는 클락이 내내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케니스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데도 불구하고 상처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에 준비된 것처럼 행동하는 정도로도 충분치 않다는 걸 알아차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분노를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똑바로 직시하다간 정말로 죽고 말 것이다. 불에 다 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포기될 수도, 타협될 수도 없는 불꽃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얼마큼의 어둠을 끌고 와야 할까. 얼마큼의 고독감을 개발해 나가야만 이 분노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 케니스뿐만이 아니라면 그녀는 앞으로도 클락을 죽일 수 없었다. 그 고독감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같은 상처에 대고 이 모든 일을 따져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공감, 분노로 이어진 일체감은 순식간에 케니스를 압도했다. 클락을 끌어안도록 떠민 것은 갑작스럽게 닥쳐온 바람과 요동치는 배가 만들어낸 공포감이었지만 그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공포감이 이끌어낸 깊은 분노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케니스는 깨달았다.

그 사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케니스는 고개를 숙이고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한 자세는 그녀가 계발시켜 온 가장 익숙한 생존법이기도 했다. 클락의 축축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서늘한 바람이 수면에 주름을 만들고, 눈물의 굴곡을 흉내 내며 물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다 젖었는데도 클락은 불처럼 뜨거웠다.

“네가… 정말 미워.”

케니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싫어한 적은 없어.”

한동안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마침내 클락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게 그거지.”

케니스는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부둣가 쪽에 아이들이 한 명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쳐다보자, 클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가 죽은 줄 알았나 봐.”

그제야 케니스가 지적했다.

“너 날 죽이려 했어.”

“누가 할 소리를.”

클락이 코웃음을 쳤지만 기분 나쁘다는 투는 아니었다.

“적당한 때 꺼내줄 생각이었거든. 사람을 그렇게 잡아당기는 게 어딨냐?”

“네가 먼저 거지 같이 굴었잖아.”

“상대를 잘 골랐어야지.”

이죽이던 클락은 얼마 안 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래. 이건 내 탓이지.”

케니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서 그래. 나도 그런 적 있거든.”

클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케니스는 굳이 그 생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클락 말대로 정말로 추워서 떨고 있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눈이 마주치자 케니스는 시선을 피했다.

“돌아갈래.”

클락은 노를 끌어 올렸다.

“그래.”

두 사람이 부둣가에 배를 매고 있을 때, 아이들은 사태에 대한 담판을 짓고 있었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때문에 케니스와 클락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남학생들은 케니스는 몰라도 클락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클락은 전에도 물에 빠졌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가 반대쪽까지 헤엄치는 것으로 해서 돌아온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두 집단 간 갈등이 극에 치닫자 싸움이란 게 그렇듯 애당초 이 사건이 어디서 촉발된 것인지 점점 모호해져 갔다. 케니스와 클락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은 나였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저수지로 내려가던 도중 보육원 방향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죽음에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 아이들은 얼마 안 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모두 흐지부지해져서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사건이 더 있었을까? 아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케니스와 클락은 한동안 붙어 다녔다. 하지만 저수지 사건이 있었던 직후였기 때문에 설마 그 둘이 사귀게 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다. 특히 남학생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 입장에서 클락은 건방진 케니스에게 본때를 보여준 영웅이었고, 그에게 뜨거운 맛을 본 케니스는 클락과 앙숙이 되어야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클락 특유의 심드렁한 태도와, 케니스가 십분 발휘한 시니컬한 모습은 이 일이 별로 요란을 떨 수준도 못 되는 사건인 양 축소시켰다.

며칠도 되지 않아 아이들은 두 사람이 무언가 의견 조율을 시도하고 있겠거니 하면서 두 사람이 뭘 하고 다니던 신경을 꺼버렸다.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교사들의 눈을 절묘하게 피해 가며, 그러나 아이들은 충분히 목격할 수 있을 법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케니스가 클락에게 팔짱을 끼고 몸을 기울이던 모습을 기억한다. 일부러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내며, 지금에 와서는 교태를 떤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태도로 팔을 살살 흔들면서 클락을 부추기고 또 부추겼다. 케니스가 클락에게 정확히 뭘 원했는지는 모른다. 아마 단순히 사귀자고 하거나 섹스를 하자고 조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내 눈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케니스가 클락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 그랬으리라.

하지만 내가 이 시기를 견딜 수 없던 건, 여태껏 남보다 못한 사이인 양 행세하던 두 사람이 실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로 합의한 것처럼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아치형 복도를 걸으면서 본관 서쪽으로 난 조그마한 정원을 살펴보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 흐린 탓에 하늘은 오묘한 회청색을 띄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코너를 도는데 클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케니스가 작게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두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클락은 케니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가 막 놓아준 참이었다. 케니스는 신경질이 난 것 같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태도야말로 본연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려고 이따금 손을 들어 올리는 케니스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채로 서 있는 클락은 진지해 보였다. 그들은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면서 무언가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진지한 얼굴의 클락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그는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구체적으로 짚자면 클락은 케니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케니스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것은 반대로 케니스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어정쩡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느낌 때문에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줄곧 자리 잡고 있던 긴장감과 편안함이 오묘하게 뒤섞인 순간을 목격한 것이었는데, 그 순간은 보육원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잃어버린, 그러나 한때는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태도를 상기시켰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나를 존중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 보이며 타인을 대하는 자유로움이었다.

나는 클락과 케니스의 인상이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 두 사람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사실이 내 가슴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내가 미처 잡아내지 못했던, 못돼빠졌다거나 교묘하다거나 얌체 같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케니스의 타고난 성질. 어쩌면 예민하게 곤두서서 끝없이 감추어진 것을 목격하고, 지적하고, 암시하고, 회피하는 그녀의 그러한 기질만이 남들이 끌어낼 수 없던 클락의 여러 가지 일면을 바깥으로 부추겨 내 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클락의 성질이 케니스에게 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게 느껴졌다.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용을 쓰던 간에 그들로부터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끌어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한 화학 작용이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흐르는 힘과 같고, 그들이 원한다고 거두어들이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내가 목격한 건 두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낸 연출 따위가 아니라 불현듯 스쳐 갈 수많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분명한 중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흐르는 기질 간의 충돌이 이끌어낸 그 순수한 자연스러움이 그들의 고유한 감수성을 엄호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두 사람은 무슨 일을 겪던 훼손되거나 상처받을 수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이 언젠가 사랑에 빠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그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적어도 내가 보육원을 다닐 동안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점차 교류가 뜸해졌다. 같이 붙어 다니는 일이 슬슬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복도에서 마주쳐도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지나치기에 이르렀다. 내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그랬던 것 같진 않다.

이따금 클락 혼자 사라지는 일이 있긴 했다. 그때는 보통 케니스도 같이 사라졌다. 나는 두 사람이 다시 창고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 앞에선 데면데면한 척 굴면서 뒤로는 몰래 만나 공부를 하던 두 사람만의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어느 날 끓어오르는 질투를 이기지 못한 나는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창고 내부는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와 똑같았다. 공책은 여전히 마룻바닥 아래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었고, 쪽지도 살펴봤던 그대로였다. 뭐 하나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디서 대체 뭘 하는 걸까?

한번은 클락을 떠보기 위해 케니스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때 클락은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려다 말고 내 고백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자기에게 하냐는 눈이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그래. 너 전부터 유달리 걔만 신경 쓰잖아.”

“내가 언제?”

클락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쯧 혀를 차면서 바닥에 만들어 둔 구덩이 속에 다 쓴 성냥을 던져 넣었다.

“됐어. 걔 좋아하는 애가 한 둘이냐. 다들 별 생각 없을 걸.”

‘그럼 너는?’

나는 클락에게 왜 케니스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 거냐고, 독점하려 하지 않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클락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우리 중에 두 번째로 키도 컸고 싸움도 잘했으며, 유능한 데다 냉철했다. 게다가 누가 다가오던 간에 슬그머니 뒤로 빠져 버리는 케니스가 클락 말이라면 잠자코 듣지 않는가. 나는 클락이 케니스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면 공식적으로 확실히 해주기를 바랐다.

클락의 입술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담배가 위아래로 까딱였다. 그는 잠깐 본관 쪽을 응시했다. 강당에서 저학년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새 나오고 있었다.

“이따 시장 사거리까지 갈 거거든. 생각 있으면 너도 나와.”

“거기까지 간다고?”

“뱅크스네가 봐둔 가게가 있대.”

클락은 담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를 쳐다보았다. 가치 있는 제안을 했으니 쓸데없는 대꾸는 듣고 싶지 않다는 눈치였다. 거기다 대고 더 캐물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점에서 클락은 늘 무심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갈게.”

그러자 클락은 내게 담배를 내밀었다.

돌아오는 길에 케니스를 보았다. 그녀는 미스 메이필드와 다른 소수의 여학생들과 함께 예배당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더니 고개를 숙이고 미스 메이필드를 뒤따랐는데, 품에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케니스는 고학년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충 수업을 듣고 나오던 길인 것 같았다. 여태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게 다 수업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빠졌던 수업 진도를 다 따라잡을 셈인 걸까? 나는 클락이 담배를 입에 문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모습을 떠올렸다. 클락이 교실로 돌아갈 일은 요원해 보였다.

케니스는 결심을 다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려는 진 모르겠지만,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던 간에 혼자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6

클락 캄벨의 광란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모험을 즐겼다. 점점 과감해진 그는 보육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남학생들은 겁도 없이 물건을 훔치거나 뒷골목의 나이 많은 형들로부터 담배나 술 따위를 얻어와서 침대맡에 감추어 놨다가, 새벽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자랑스레 담배를 피우고 럼을 홀짝였다. 그 일만으로도 다들 충만해 하고 만족했지만, 클락은 달랐다. 그는 힘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클락은 전보다 뱅크스와 자주 어울렸다. 두 사람은 기가 막힌 한 쌍이었다. 뱅크스가 계획을 세우면 클락은 그게 무엇이던 간에 서슴없이 실행했다. 한번은 뱅크스가 변두리에 위치한 양복 가게 유리창을 깨버리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난 뱅크스가 반쯤은 허세를 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얘길 들은 클락은 곧장 아이들을 끌고 가게로 몰려가서 주먹만 한 돌로 유리창을 내려쳐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뱅크스의 낯빛이 순간 퍼렇게 질렸던 것을 기억한다.

“아무도 없었지?”

“없었지.”

“가게 주인이 알면 어떡하지?”

“거기 문 닫은 지 두 달은 넘었다며. 이제 와서 무슨 걱정이야?”

클락이 아무렇지 않아 하자 뱅크스는 곧 진정했다. 클락의 태연자약함에 동화된 나머지 가게 유리창을 깬 정도는 그의 말대로 별것 아니겠거니 하고 저 좋을 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 무렵 뱅크스는 자기가 벌인 사건사고가 어떤 결과로 되돌아오게 될지 전혀 계산이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뱅크스의 허세는 갈수록 무모해져 갔다. 그는 강한 남자로 보이는 데 점점 집착했다. 문제는 그 때문에 누군가 뱅크스에게 제동을 거는 일은 별로 남자답지 않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클락이 뱅크스의 허황된 이야기나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계획에 우스꽝스러운 딴지를 걸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지만, 이제는 그러한 균형이 깨졌다. 클락은 무엇이든 따라나섰고 때로는 과도하게 흥분한 뱅크스를 대놓고 방치해 그 멍청한 머리에서 더 어리석은 짓이 튀어나오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클락과 가까워졌다. 뒤늦은 성장기를 거쳐 점점 키가 자라기 시작한 나는 꿀릴 것 없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외출하여 골목을 종횡무진 쏘다녔다. 종종 클락이 거기 꼈고, 나중에는 나와 단둘이 행동하기도 했다. 클락이 변두리 양복점 유리창을 깰 때 나도 거기 있었다. 그는 이따금 나에게 담배를 빌렸고 다음 외출 계획이나 뱅크스에 대한 시시한 농담을 흘리면서 히히덕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드디어 내가 꿈꾸던 위치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이제 두말할 것 없는 그의 친구였다.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부풀었다. 클락이 조만간 케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솔직하게 공유해 줄 거라, 아니, 뭐 그리 내밀하진 않더라도 남자애들끼리는 충분히 공유할 법한 그러한 얘기인 양 암시하며 들려주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일이야말로 클락이 나를 친근히 여기는 증명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조마조마하게 쓰레기장 옆에 위치한 창고 얘기를 꺼내며 그를 떠본 적도 있었다. 여자 친구나 이상형에 대한 얘기를 꺼내 보기도 했고 하다못해 저수지 사건을 언급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클락은 끝끝내 조금의 단서도 주지 않았다. 그는 그 주제가 지겹다고 했다.

이따금 혼자 그 창고로 돌아가 보곤 했다. 주로 클락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때에 실행한 일이었다. 나는 매번 잔뜩 긴장한 상태로 언덕을 올라 가 창고 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그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목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창고는 텅 비어있었다. 마룻바닥을 뜯어보면 공책과 쪽지는 늘 그대로였다. 마치 내가 목격한 그 순간부터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던 사적인 역사가 화들짝 멈추어 서 더는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두 권의 공책은 무엇 하나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은 채, 처음 봤던 모양새대로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큰일이 벌어졌다. 패거리가 유리창을 깼던 양복점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아들 내외를 만나러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생각보다 여정이 길어지는 바람에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가게는 엉망진창인데다 깨진 유리창을 넘어 누군가 물건을 훔쳐 간 흔적까지 있었다.

분기탱천한 그는 수소문 끝에 자신의 가게 유리창을 박살 낸 것이 다름 아닌 한 무리의 보육원 남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게 주인은 그 길로 곧장 레넌 코트에 청구서를 보냈다. 가게 유리창뿐 아니라 도난 당한 양복과 시곗줄 값을 전부 청구한 금액이었다.

우리는 심문을 당했다. 의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사실 다들 무척 겁에 질려 있었다. 클락을 누가 고발했는지는 모르겠다. 난 뱅크스라고 생각한다. 비열한 자식.

클락은 남자 기숙사 사감에게 개처럼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새로 온 남교사는 가죽 혁대를 풀어 채찍처럼 있는 힘껏 휘두르면서 클락을 아주 모질게 매질했다. 그가 체벌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폭력이라면 이골이 나 있던 우리였지만 그렇게나 과묵했던 교사가 한순간 짐승처럼 돌변해서 클락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모습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당시에는 대다수가 상황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잘못하긴 했지.”

나중에 뱅크스는 멍한 눈빛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끔찍한 매질이 끝난 후 클락은 별다른 조치도 없이 독방으로 보내졌다. 감금 첫날 나는 그가 걱정되어 교장실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나는 작게 신음하며 침묵하고 있는 클락에게 정말 용감했다고 우선 찬사를 퍼부은 다음, 죄를 고백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머뭇머뭇 말했다.

“돌을 맨 처음 던진 건 나야.”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 없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지금 당장 교사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고백할 자신도 없었으면서. 아니면 클락에게 나 역시 공범자 중 하나이며, 본보기로 체벌 당한 그와 운명을 함께하고 있다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잠시 후 끙 소리와 함께 힘겨운 목소리로 클락이 빈정거렸다.

“그래, 참 잘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클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모두 기다리고 있을게, 씨씨.”

한참 후 작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렇게 해서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어디를 가던 클락의 생각을 놓지 않으려 했다. 소매치기를 하다가도, 모여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어떤 귀족 자식의 자동차 바퀴 나사를 풀고 도망을 치다가도. 순간의 치기로 무작정 사고를 쳐놓고 뒤이어 닥쳐온 현실 감각에 다 같이 겁에 질린 미소를 교환할 때면 나는 아이들에게 클락의 존재를 상기시켜주기 위해 주문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씨씨가 올 거야.”

우리의 성취감을 고취시키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던 클락이 그 냉정한 과감함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한편으로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왜인지 케니스 생각이 났던 것이다. 품에 방어적으로 책을 안고 고개를 숙인 채 복도 끝으로 사라지던 케니스. 이제 케니스는 시시해 빠진 범생이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우리가 어떻게든 레넌 코트로부터 더 멀리 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모험심을 시험하는 동안, 케니스는 예배당에 앉아서 자수를 놓고 옷감을 손질하고 남는 시간 동안에는 간단한 수식과 계산법을 받아쓰기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클락이 다시 그 창고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다는 예감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러면 우리가 나눈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예감을 나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사실 “씨씨가 올 거야.”라는 말은 결국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주문이나 다름 없던 것이다.

클락의 독방 처분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였다. 독방을 나오자마자 그는 고열에 시달렸다. 그날의 체벌이 너무도 가혹했던 나머지 몸이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그는 몇 번 정도 정신을 잃었다 깼다 하면서 몸을 짓누르는 뜨거운 열에 점차 기운이 꺾여갔다. 처음에 교사들은 클락을 병동에 보내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정말로 죽을 것 같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병동으로 보냈다.

내가 클락을 다시 만난 건 그가 퇴원한 다음, 그러니까 독방 문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 지 한 달이 넘게 지났을 무렵이었다. 클락은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는데, 내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자 잠깐이지만 멀쩡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곧 다 붙을 거래.” 그가 말했다.

돌아온 다음에도 클락은 한동안 우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혼자 시간을 죽였다. 낙엽이 다 떨어지고 가지가 점점 앙상해지기 시작했다. 종종 그를 만나러 갔지만 클락은 자리에 없거나, 아니면 내가 옆에 있는 것을 대놓고 귀찮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리로 갔더니 어쩐 일로 침대를 빠져나온 클락이 말끔한 얼굴로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안개가 짖은 날이었다. 뿌연 창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씨씨, 이제 괜찮은 거야?”

“뭐 그렇지.”

나는 그가 평소와 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클락은 머리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꼭 답이라도 구하는 사람처럼. 거기에 신의 손자국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 답이 딱 떨어져 있고, 걸어가야 할 길이 손금처럼 길쭉하게 뻗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 뭘 선택하면 되는지, 더 나은 쪽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하지만 클락이 응시하던 그곳은 삭아 빠져 서서히 냉기를 내뿜기 시작한 보육원 천장에 불과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클락이 아주 또렷한 눈을 했던 게 떠오른다. 새까만 두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돌더니 날카롭게 좁혀지며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단숨에 압축시켜버렸다.

“조만간 에번스나 다녀와야겠다.”

클락이 말하는 것은 식당가 뒤쪽에 위치한 잡화상점으로,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도 싸구려 담배나 술 따위를 거래해 주는 곳이었다. 클락도 종종 그곳에서 물건을 얻어다 썼다. 나는 클락이 기운을 차렸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물었다.

“담배라면 빌려줄 수 있는데.”

“담배는 이제 질렸어.”

“그러면?”

“뭐가 더 들어왔는지나 구경하려고. 거긴 원래 물건이 자주 바뀌잖아.”

그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했다. 다시 외출을 하고, 가게나 사람들을 구경하고, 한동안은 얌전을 떨기야 하겠지만 사고를 치면서 돌아다닐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체벌 사건 이후 움츠러들었던 뱅크스 패거리와 아이들은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을 주고받았다. 그 무렵 우리에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매섭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성이 절실했던 것이다.

며칠 뒤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담을 넘을 때 클락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른 누군가 알아차리기 전에 슬쩍 자세를 바꾸어 날렵하게 건너편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그가 몸 상태가 나쁜 것 같아 눈길을 주었지만, 클락은 손바닥을 내려다 보며 혀를 찼을 뿐 금방 보폭을 빠르게 해 아이들을 따라잡았다.

우리는 자주 다니는 루트로 해서 골목을 빠져나와 번화가에 도착했다. 큰 도로와 귀족들의 마차, 젊은 여자들의 무겁고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선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가 있는 줄조차 몰랐지만 그렇다고 소란을 피우면 안 되는 곳이었다. 한동안 길거리를 내다보던 우리들은 잠시 후 방향을 틀어 상점가 쪽으로 접어들었다.

에번스에는 새로운 상표의 담배와 못 보던 사탕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싸구려 담배와 성냥 몇 갑, 흰 종이에 싸여 있고 가루가 묻어 있는 사탕 따위를 얻고 신이 나서 왁자지껄 싸돌아 다니며 그렇게 몇 시간을 죽였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슬슬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누군가 그 괘씸한 양복점 가게 주인 얘기를 꺼냈다.

가게 유리창만 깼을 뿐인데 도난 당한 물품까지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일을 더 나쁘게 만든 그 욕심쟁이 가게 주인 말이다. 우리는 그를 비열한 기회주의자라고 욕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과열되어 갔다. 언젠가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공동의 적을 욕하는 일이 주는 쾌감에 금방 도취되어버렸다.

우리는 본보기로 매질 당한 클락에게 품었던 죄책감을 털어버릴 셈으로 돌아온 클락을 더욱 추켜세우면서 본때를 보여주자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자식의 가게를 제대로 털어버리자고 말이다. 진짜 망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절망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주자고 했다. 그러면 그 빌어먹을 자식도 모멸감이란 게 뭔지 알 수 있겠지.

“씨씨, 갈 거야?”

“가야지.”

클락의 대답에 모두가 환호를 내질렀다. 양 손바닥으로 나팔을 만들어 “우우우”거리면서 짐승처럼 날뛰었다. 소란 속에서 클락이 킬킬대며 떠밀렸다.

“복수가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은 몰랐는데.”

“얼른 가자, 씨씨!”

“단숨에 끝날 걸.”

우리가 우르르 양복점으로 몰려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주변 상점가가 전부 문을 닫은 시간대였기 때문에 거리는 어둠에 싸여 있었다. 양복점에 걸린 ‘CLOSED’ 간판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 다음, 다 같이 바지를 내리고 그 앞에다 오줌을 갈겼다. 그러는 동안 클락이 어딘가에서 묵직한 벽돌을 가지고 나타났다.

클락은 있는 힘껏 가게 창을 향해 벽돌을 내던졌다. 와작 소리와 함께 벽돌이 날아가 박히더니 창살이 무너지면서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클락이 유리창을 헤집어 문을 땄다. 모두 “와아아!”소리 지르며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복수심에 불탔지만 점차 희미해져 갔다. 무언가 해냈다는 막연한 성취감과 다 같이 일을 치고 있다는 강렬한 흥분에 사로잡힌 우리는 광란에 빠진 상태에 접어들었다. 가게 물건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고 손에 잡히는 건 무엇이든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는데, 망을 보던 누군가가 “슬슬 가야 될 것 같은데.”하고 말했다. 우리는 곧바로 손에 잡힌 것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옆에서 누군가 살짝 겁에 질린 목소리로 “다 부순 거지?”하고 중얼거리던 게 기억난다.

“이 정도로는 안 되지. 이러면 또 전부 돈으로 내놓으라고 할 거 아냐. 두 배로 쳐서.”

클락이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근데 난 그런 거 없거든.”

그가 확 성냥을 긋자 불꽃이 번쩍였다. 침을 뱉듯 가벼운 스냅으로 성냥을 바닥에 던졌다. 돌발 행동에 얼어붙었던 우리들은 잠시 후 클락이 보여준 과감함에 동화되었다. 결국 너도나도 성냥을 꺼내 들어 불을 붙였다. 피시시 꺼지던 불꽃은 이내 서서히 타올랐다. 쓰러진 의자와 옷감 따위에 옮겨붙으며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망을 보던 아이가 “온다, 가야 돼! 지금 가야 돼!”하고 외쳤다.

“씨씨, 나가자!”

“뛰어!”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를 따라 가게를 뛰쳐나오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를 빠져나오던 클락이 입구에서 불현듯 멈추어 섰다. 천장으로 옮겨붙은 불이 삽시간에 번져 창틀 사이로 날름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씨씨!”

나는 불안하게 거리를 살폈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수선스러워진 근방의 상황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클락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가자.”

탁 소리와 함께 나무가 스러지고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가게 안쪽에서 들려왔다. 도망치던 아이들도 고개를 돌려 양복점을 바라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진 불은 마침내 지붕 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가게만이 환하게 타올랐다. 경찰들의 발소리, 골목 너머에서 어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저기 좀 봐요!”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꼴 좋다!”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눈이 멀어버릴 듯 환한 불길과 팔에 와 닿는 열기가 뜨겁다 못해 따가웠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나는 클락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씨씨, 정말 가야 돼.”

“저것 봐! 옆에도 옮겨붙을 것 같은데.”

나는 클락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탁 탁 타오르며 불꽃이 건물을 집어삼키는 소리, 호루라기 소리, 비명과 아이들의 고함 따위가 사방에서 아우성치며 우리의 목을 졸라왔다. 그때의 클락이란… 그 모습이란.  나는 클락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오래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우리를 경도시킨 과감함, 앞뒤를 재지 않고 덤벼드는 담력, 그 모험심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광기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마침내 클락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뒤따라 달렸다. 불꽃에 드러난 클락의 등이 환하게 타올랐다. 반면 역광을 진 그의 절반은 골목에 도사리는 어둠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으로 그는 빨려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것이라곤 우리가 막 저질러 놓은 방화의 결과물뿐이었지만, 그 빛에는 분명한 악의가 있었다. 그것은 마음을 갉아먹는 악의였다. 영혼을 파괴시키는 악의였다. 클락이 무어라 외쳤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때리고 죄악감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왜 우리가 이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는지를. 그건 생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잘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뭔가가 이미 정해져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고, 그게 무엇인진 몰라도 지겹다는 느낌을 그때만큼 생생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모든 게 단순해져 버렸다.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어느 때보다 격렬히 깨닫고 말았다. 우리는 다 공허했다. 그렇지, 공허함이다! 케니스가 말했다. 공허함이 우리를 틀어쥐고 있노라고. 그 손아귀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평생 모른 채로 살아갈 것이다. 잘못된 적만을 고르면서. 그것만이 우리를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발밑에 놓인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려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남을 떠밀어 버릴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타인과 연관 지어갈 것이다.

어쩌면 사내들이 그토록 여자한테 매달리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체면을 차릴 수 없어서, 작은 농장 하나 가꿀 수 없어서, 직업 없는 불안정한 삶을 버틸 수가 없어서 느끼는 그 아득한 공허감을 몸으로 틀어막으려다 전부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몸을 떠올린 거였다. 이런 멍청한 일 따위 저지르지 않아도 손쉽게 원초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 축축한 육신을. 공허함을 잊게 해주는 빠르고 단순한 행위를. 쉬운 길, 너무도 쉽기만 한 그 길을. 진실로는 어둠 속에서 나를 일깨워 줄 누군가를….

“아아. 필요 없어!”

지겹다는 듯 클락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전부 필요 없어! 전부! 전부!”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고함이 어둠을 산산조각 냈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클락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어두운 골목 끝에서 멈추어 섰다. 어디론가 굴러떨어질 뻔한 사람처럼 발끝을 살짝 든 채였다.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이던 클락은 결국 체포되었다. 그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망연히 쳐다보다가 뺨을 닦았다.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날 우리가 저지른 방화는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옮겨붙었다. 불은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양복점이 전소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방화 사건에 대한 여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갔고, 어른들이 결과적으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는지는 잘 모른다. 런던에서 그런 소규모 화재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하는 법이니까.

도주하다 붙잡힌 뱅크스와 일당 몇 명은 결국 체포되어 소년원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반년 넘게 클락과 우리 패거리의 주축이었던 뱅크스 일당을 보지 못했다.

레넌 코트에도 전면적인 보완이 이루어졌다. 규칙 몇 가지가 강화되었고, 감시와 통제가 극심해졌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돌아가며 남교사에게 두들겨 맞았다. 삼엄한 감시 아래 다들 쥐 죽은 듯 얌전하게 행동했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꼼짝 못 했으리라. 화재 규모가 범죄로 다뤄질 만큼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는 데다가, 주축이 되었던 아이들 전원이 소년원 처분으로 끝나버린 모험의 결과는 우리의 활력과 의지를 빼앗아 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케니스가 보육원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무렵의 일이었다.

아직 일이 년 정도는 더 머무를 수 있는 나이인데 일이 왜 그렇게 되었나 싶었더니 그 사이 취직을 했다고 했다. 미스 메이필드는 케니스가 무척 운이 좋다고 했다. 신분 보증 서류를 써달라고 찾아와선 자기와 담판을 지었다는 것이다. 미스 메이필드는 케니스가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꼭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언짢은 듯 입을 오므리고 말했다.

“그 애가 재주는 있던 모양이지. 그런데 여자아이로서 유용한 재주는 아닌 것 같구나.”

떠나던 날 케니스가 나를 찾아온 건 정말로 의외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케니스에게 남들보다 더 하찮고 별것 아닌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케니스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클락과 관련된 일이라고 했다. 왜 하필 나를 고른 것이냐고 묻자 케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넌 언제나 걔 뒤를 똥개처럼 쫓아다녔잖아.”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제야 케니스가 처음으로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들이 떠들던 케니스의 모습이 비로소 내 눈에 들어왔다. 탄력 있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만이 케니스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애의 눈매가 깊고 무심하다는 사실을 어쩌면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길고 큰 눈은 치켜 뜰 땐 활기가 느껴졌지만 내리깔면 사색적이고 침착해 보였다. 그런 상반된 인상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미간을 향해 휘어지는 눈꺼풀 선의 절묘한 대비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반듯한 콧대와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똑 떨어지는 턱선은 그림처럼 완벽했다. 케니스의 얼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그런 절묘하고 날카로운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케니스는 아름다워져 있었다. 여태껏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케니스는 어딘가 권태로워 보였다. 세상이 어떻고 남들이 뭘 어쩌던 간에 이제 자기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특유의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진정으로는 무심해 보였다. 하지만 케니스의 인상이 드러내는 그 아름다움이란 청초한 꽃이나, 사근사근하게 내려앉는 보드라움과는 전혀 달라서, 마치 섬세하게 세공된 화장대 앞에 앉아 뒷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훔쳐보는 듯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언제든 쥘 수 있는 칼이 옆에 놓여 있는 것과 같아, 설령 케니스가 그 칼을 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칼날 자체가 너무도 날카로운 나머지 사람을 절로 긴장시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케니스가 결국 어디로 향하게 될지 궁금했다. 그녀는 또다시 누군가의 마차 안으로 끌려가게 될까? 그때 케니스가 내게 쪽지를 내밀었다.

“이것 좀 클락에게 전해줄래?”

“이게 뭔데?”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 주소야.”

“왜 이걸 씨씨한테 남기는데?”

“친구니까.”

쪽지를 받아 든 다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나 너희가 남긴 공책 봤어.”

케니스는 눈썹을 치켜올리긴 했지만 무감한 표정이었다.

“너희 둘 창고에서 정확히 뭘 한 거야?”

“읽어보면 알잖아. 안 펼쳐봤어?”

내가 침묵하자 케니스가 되물었다.

“읽을 줄 몰라?”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케니스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 위로 빛이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알았다. 그 빛에 깃든 건 악의도 무엇도 아니었음을. 다만 나를 부끄럽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그 빛은, 아마 케니스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빛일 것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뭐랄까. 사람의 수치를 드러내 보이는 빛이라고 할까. 감춰두는 편이 나을 법한 비밀을 발견하는 데에만 탁월한, 아주 못돼먹은 통찰의 빛이었다. 케니스는 언제까지나 나쁜 아이일 것이다. 그런 걸 안고 살면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너 나이가 몇 살이지?”

나는 열여섯 살이라고 대답했다.

“글공부는 좀 해.”

케니스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러게. 그게 남아있었네.”

“뭘?”

“단어 공책. 그냥 버려줘. 그것도 부탁 좀 할게.”

“너 씨씨한테 정말로 글공부를 알려준 거야?”

“그래. 근데 걘 열심히 안 했어.”

정문을 바라보며 케니스가 중얼거렸다.

“걘 내가 쓴 거 반도 이해 못해.”

그걸로 끝이었다. 케니스는 떠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케니스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찾아가 보지 않았다. 그녀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대신에 나는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책상에 앉아 글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글을 쓰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것에도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다.

그 뒤 나는 레넌 코트를 나왔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나름대로의 생활을 이어갔다. 모든 것이 점차 희미해져 마침내 망각의 구렁텅이로 미끄러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레넌 코트에서 있었던 일들, 정확히는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인정한다. 슬프게도 그 시절 케니스는 나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난 그리 똑똑한 아이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고백해야겠지.

케니스의 부탁이 있었음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창고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레넌 코트를 떠나기 몇 주 전 마지막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마룻바닥을 들어 올린 다음, 공책 두 권과 한 무더기의 쪽지를 꺼냈다. 그랬다. 그때까지도 그 모든 것은 창고 아래에 잠들어 있었고, 그 무렵엔 나도 내용을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아주 오랫동안 케니스가 남긴 두 권의 공책과 두 사람이 주고받은 쪽지를 읽었다. 처음 몇 장에는 여러 차례 단어를 받아 쓴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클락은 좋게 봐도 열정적인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책의 반 정도를 썼을 때부터 그의 흔적은 뚝 끊겨 있었다. 하지만 케니스는 클락이 더는 공부를 하지 않게 된 뒤에도 한동안 혼자서 글을 써 나갔다.

나는 클락의 노트 반절이 케니스의 글씨로 빽빽하게 들어찬 것을 보았다. 거기엔 케니스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감정과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스프링필드 아이들과 헤어지던 순간, 크리스마스의 화재, 이곳에 오는 동안 느꼈던 불안감, 여자아이들에게 배척 받는 동안 벌어진 귀찮은 일들과 남자아이들에 대한 통찰. 저수지에서 있었던 일, 거기서 목격한 것, 남몰래 간직한 클락에 대한 감상과 때때로 닥쳐오는 깊은 슬픔에 관하여 그녀는 두서없이 써 내려갔다.

그런가 하면 케니스는 그림을 그리듯 장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묘사해 놓기도 했다. 나뭇가지 틈으로 비치는 햇빛, 다리 한쪽이 삭은 의자, 야외 복도의 기둥이 그림자 지는 방식 따위의, 의미 없는 것들. 그런 훈련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자신이 본 것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묘사하려는 케니스의 시도는 오랫동안 이 공책에 쓰인 내용의 진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과시’, ‘이양’, ‘촉발‘, ‘엄호’, ‘훼손’, ‘발휘’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그녀의 우쭐하고도 우울한 지성은 내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버거워 하면서 맞지 않는 스웨터에 얼굴을 들이밀듯, 나는 그럭저럭 갖추고는 있었으나 결코 말로 잡아내지는 못했던 내 예민한 기질을 점차 케니스가 짜놓은 언어의 감수성에 맞추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내 기억과 그녀의 기억 간의 구분, 더 나아가 케니스가 남긴 기록으로 하여금 내가 상상으로 채워 넣은 빈 부분에 대한 구분은 점점 모호해져 갔다. 결국에는 무엇이 진짜 벌어진 일이었고 무엇이 케니스가 상상해낸 부분이며 무엇이 내가 이어간 망상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결국 똑같아.”

떠나는 날에 케니스는 말했다.

“어디를 가든, 결국 전부 다 똑같아.”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로부터 한참 뒤 클락이 레넌 코트로 돌아왔지만 나는 케니스가 남긴 마지막 쪽지를 전해주지 않았다. “Sincerely,”로 끝나는, 그 친근하고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결국 클락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클락이 내게 말을 걸 때면 혹시 그가 전부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가슴을 졸이곤 했다. 그는 종종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으니까. 내가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케니스가 그의 공책 뒤편에 홀로 써 내려간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정말로는 다 알게 된다 한들 심드렁한 반응 외에 달리 내놓을 게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케니스에 관련된 일 뿐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일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하거나, 무관심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약점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클락의 이런 태도는 오랫동안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도 했다가, 가장 마지막에는 외롭게 만들었다.

사는 동안 그가 조금은 나를 떠올려 줄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무심히 예감한다.

그러니까 뭐, 알았더라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 <신시어리,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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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년 반?.. 만에 쓴 자캐커플 로그입니다. 디디님... 이 글을 즐기셨길... (부디...)
캐붕이 걱정이군요. 대사나 행동 중에 이건 너무 아니다 싶은 건 말씀주셔요. 캐해석 업데이트할게요 ^^

이 글의 가제 : 친애를 하더라도 걸맞은 상대에게

하지만 너무 박정한 나머지 중간에 빡빡 지우고 수정합니다. 이 글엔 나오지 않았지만, 전 이 썰의 결말에서 씨씨가 "Sincerely,"를 돌려준 부분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조의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해석되던 상관 없다는 생각으로 썼는데, 쓰고보니... 좀... 자컾로그인데... 남친을 짝사랑(?)하는 모브남캐 시점으로 로그를 친다? 이거 괜찮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같보육원쪽지썰 저희는 케니씨씨 시점으로는 이미 벌어진 일을 다 아니까...^^ 새로운 느낌으로 봐주세요.. ㅎㅎ 그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아 시작했는데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으면... 쉬운 길로 갈 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음 진짜 피눈물 흘리며... 다신 이렇게 길게 쓰지 않으리라...
첨부한 브금은 <물에 빠진 나이프> OST 입니다. 사실 이 글 자체가 거대한 물빠나 오마쥬이기도 합니다. 케니씨씨 성사되고나자마자 붙잡고 있었는데 그땐 잘 안 풀려서 결국 놔버리고요... 이 글하고 많이 멀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쉽게 쓸 수 있었네요. 끝맺게 돼서 기쁩니다. 즐겨주셨길222

씨씨 사랑해~~~~
조는 사실 나야.... 난... 네게 집착하거든...